송희영 주필

사내 유보금 논란을 보며 로마제국 시대가 떠오른 건 어쩔수 없다. 로마의 경제 구조는 지금의 한국 경제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로마의 국가 기간산업은 농업이었다. 로마의 농업 재벌들은 식민지에서 올리브·밀을 생산하는 대형 농장을 개발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시저 암살의 주모자인 브루투스가 한때 해외 투자로 48%의 수익을 올렸다는 분석도 있다.

제조업으로 성장한 우리 재벌들은 수출로 큰돈을 벌었다. 부(富)의 축적이 해외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로마 경제와 같다. 로마의 농업 재벌이나 한국의 재벌은 공통적으로 해외에서 벌어온 돈을 쌓아두는 경영 전략을 채택했다. 국내에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도 똑같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실업자가 늘어나고 산업 공동화(空洞化) 조짐이 뚜렷했다. 로마 황제 트라이아누스가 참다 못해 박근혜 정부처럼 칼을 빼들었다. 재벌들에 매년 수익의 30%를 국내에 투자하라는 법을 만들었다. 돈이 국내로 쏠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땅값은 올라갔고 포도밭은 얕은 구릉에서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확대됐다. 부동산 버블이 발생한 것이다.

돈처럼 심보를 알 수 없는 물건도 드물다. 누르면 반드시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 열풍이 거셌다. 노사 분규가 폭발했다. 1987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는 연간 2억~5억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노조 태풍에 질린 기업들의 탈출이 시작돼 1988년에는 해외 투자가 돌연 16억달러로 몇 배 불어났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자 돈은 다시 놀랐다. 해외 투자로 빠져나간 돈은 다음 해 37억달러로 폭증하더니 1995년 53억달러, 1996년 71억달러로 증가했다. 기업의 여윳돈이 '굿바이 코리아'를 외친 것이다.

기업 유보금을 차가운 경기를 덥히는 불쏘시개로 쓰겠다는 발상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 돈이 놀고 있는 돈, 그래서 '죽은 돈'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돈이 권력자의 입맛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2000년 전 로마 황제가 보여주었다.

세계경제는 1990년대를 고비로 금융이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던 시대가 가고 금융이 실물경제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미국·일본·유럽이 자기 나라 경제를 살리려고 다퉈가며 돈을 찍어 살포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서나 돈이 풍성해졌다. 투자할 돈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덕분에 신흥 개발도상국가들(NICs)이 탄생했고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같은 브릭스(BRICs)도 떠올랐다. 선진국들이 뿌린 성장 통화 덕분에 고속 성장 국가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돈을 찍어내 불황을 공략하는 방법이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은 2008년 금융 위기로부터 6년이 넘도록 여태 불황 탈출을 선언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도 경기가 회복됐다곤 하지만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해 기업들이 본격적인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우리 정부도 이제 돈을 풀겠다고 선언했다. 정부 지출을 확대하고 금융에서도 물꼬를 틀 움직임이다. 다른 나라 움직임에 맞춰 거부하기 힘든 정책이다. 다만 그것이 장기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다. 지폐가 뿌려진 후엔 부동산이든 증권이든 버블 현상이 나타났다가 곧 붕괴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는 사실, 각국이 비슷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정책 효과도 반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정권이 경기 회복을 앞당기길 진정으로 바랐다면 박 대통령 취임 초부터 고삐를 당겼어야 했다. 경제 회생 대책도 돈을 푸는 것과 함께 거대한 규제(規制) 생산 공장인 공무원 조직의 개조부터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우리 경제 상황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로부터 4000년이 넘는 이자율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 있다. 시드니 호머(Homer)와 로버트 실러(Sylla)가 정리한 '금리의 역사'(리딩리더 번역)는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가 경제를 일으키고 문명을 흥하게 만든다고 했다. 16세기 중반 이탈리아 제노바 등지에서 연 2% 아래의 저금리 시대가 십수 년 지속된 이후 르네상스의 용틀임이 시작됐다. 영국도 1688년 명예혁명과 함께 네덜란드의 저금리 정책을 도입하면서 대영(大英)제국의 건설이 시작됐다고 한다.

돈이 풍성하고 돈의 가치(금리)가 떨어진 오늘의 현실은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역사적 혁명을 부르는 파도일 수 있다. 하기에 따라서는 더 풍요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뒤로 후퇴하기 싫다면 그 혁명의 물결을 타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