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경북 안동시 민속촌길. 안동댐 하류 500여m 지점에 있는 안동민속박물관에서 안동문화관광단지 쪽으로 7~8분 걸어가니 길 왼쪽에 아담한 기와 고택(古宅) 10채가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었다. 짧게는 200년, 길게는 400년이라는 세월을 꿋꿋이 버텨낸 옛 가옥들이었다. 하지만 이 고택들은 원래 이곳에 지어진 것은 아니다. 수백년 뿌리 내리고 있던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을 떠오다시피 해서 옮긴 것이다. 이 중엔 안동댐 건설로 수몰(水沒)될 위기를 피해 옮겨온 집도 여럿 있었다.

경북 안동‘구름에’고택(古궀) 리조트 전경. 수백 년 된 고택 8채가 욕실 등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춘 숙박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랜 풍상(風霜)에도 한옥(韓屋)의 담백한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고택들은 최근 단순 '볼거리'에서 현대적 편의시설을 갖춘 '숙박시설'로 대변신을 시작했다. 이날 현장에선 다음 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희승 안동민속박물관 민속향토연구담당 실장은 "이 고택들은 2005년 이후 차례로 이곳에 옮겨져 지금까지 민속박물관의 야외전시관으로 사용됐다"면서 "앞으론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한국의 전통 고택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고택 단지에 있는 10채 중 실제 숙박시설로 전환되는 집은 모두 8채. 나머지 2채는 지금도 문중 제사 등에 사용되고 있다.

지방 관광지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이 고택들이 어떻게 다시 새로운 용도로 부활하게 됐을까.

1831년에 지은‘칠곡고택’의 야경.

◇리조트로 탈바꿈하는 고택

지난 2011년 늦가을 경북도청과 안동시 관계자 4명이 서울에 있는 SK행복나눔재단에 들어섰다. 이들은 "경북엔 버려지고 제대로 관리 안 되는 유휴 고택이 상당히 많다"며 "이 고택들을 활용해 사회적 기업을 키워보지 않겠느냐"고 손을 내밀었다. 전국 650채 이상 고택문화재 중 절반 가까이가 경북에 밀집해 있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보존이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SK행복나눔재단 관계자는 "당시 재단 내부에서 해보자 말자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있었고, 특히 전통문화 관련 사업을 해보지 않은 터라 고민도 많았지만 우선 현장을 살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상 고택을 선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업을 운영할 정도의 규모가 되는 고택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처음엔 안동 하회마을을 찾았다. 양진당과 충효당, 북촌댁, 옥연정사 등 널리 알려진 고택은 많았지만 거리가 떨어져 있어 사업체가 운영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헌구 SK행복나눔재단 사회적기업본부 부장은 "숙박 사업을 하려면 고택이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가 돼야 하고, 운영자가 관리할 수 있는 지역적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며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고택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정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혹시나…"라는 마음에 둘러본 곳이 안동댐 수몰지역 고택들을 옮겨 놓은 단지였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10여채의 고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상태도 괜찮았다. 전체 방의 개수도 25개에 달해 사업 운영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이 고택 중 4채는 1976년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 지역에 있는 것을 정부가 안전지대로 옮긴 집이다. 나머지는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데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소유자가 안동시에 관리를 위탁하면서 이 지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상일 안동시 문화재연구담당은 "10채를 이전하는 데 모두 100억원의 예산이 들었다"면서 "지붕과 기둥, 서까래는 물론 문고리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레 옮겨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택은 일반 한옥과 달리 하나하나 사연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매력적이었다.

계남고택(溪南古宅)은 퇴계 이황 선생의 11대손인 쌍취 이만운이 살았던 집으로 경북 민속문화재 8호로 지정돼 있다. 벼슬이 병조참판까지 오른 이만운이 경주부윤을 지냈기에 세간에선 이 집을 계남 경주댁(慶州宅)이라고도 불렀다. 또 이 집에선 참판이 여러 명 배출됐다고 해서 '3대 이조참판댁'이라고도 한다. 칠곡고택(漆谷古宅)의 경우 퇴계선생 10대손인 이휘면이 살던 집으로 1831년 세워졌다. 이휘면의 아버지인 아산현감 용곡 이정순은 형제 우애가 지극해 동생 이주순이 결혼 직후 요절하자 자신의 막내아들 이휘면을 제수에게 양자로 보내 이 집에서 평생 모시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택 10채는 각각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계남고택과 칠곡고택이 종갓집 다음가는 큰집과 대갓집이었다면 팔회당재사와 감동재사는 제사를 준비하는 살림집이었고, 서운정·청옹정·박산정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공부를 하던 정자였다. 이 중 박산정은 지은 지 400여년이 된 정자로 조선 선조 때 공조참의를 지낸 이지가 학문 수양을 위해 1600년대 초에 처음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리조트 관리인 숙소로 사용되는 초가집도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가옥이다. 안동 북부 지역에서만 보이는 '까치구멍집'으로 천장 양쪽 끝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이 마치 까치가 드나드는 구멍 같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고택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현대식 편의 시설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지역의 오래된 한옥(韓屋)과 다를 게 없는데 들어가 보면 집안 구조는 현대식이다. 손바닥 반만 한 스마트키를 들고 방문 앞으로 다가가면 문이 '찰칵'하고 저절로 열린다. 방과 마루는 간접조명이 은은한 빛을 내뿜도록 했고, 집집마다 에어컨이 설치돼 있는 것은 물론, 무선 초고속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다. 화장실과 샤워 시설도 실내에 배치해 한옥의 불편함을 보완했다. 벽과 천장에서 스며드는 웃풍 차단을 위해 단열재를 시공, 겨울에도 따뜻한 실내 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이헌구 SK행복나눔재단 부장은 "고택은 재방문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화장실 등이 불편하고 겨울에 너무 춥기 때문"이라며 "고택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 전문 수리업체 '선재'의 최우진 현장소장은 "고택의 내부 공간을 현대인의 생활과 동선에 맞게 개조하는 것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 같다"며 "숙박하기에 편리하면서도 한옥의 정취를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고택을 고급 숙박시설로 발전시키는 것은 고택 체험이 우리 사회의 큰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란 자신감이다. 이강백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회장은 "4~5년 전부터 우리의 전통 고택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이 매년 급격하게 늘고 있다"며 "현재 전국에서 고택 200여채 정도가 숙박 체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왼쪽 사진)정자 '박산정'의 마루와 객실. (사진 오른쪽)정자 '서운정'의 욕실. 두명이 들어갈 수 있는 하얀색 욕조가 설치돼 있다.

◇여행 가방 옮겨주고 이불도 갈아줘… 관리·운영도 호텔급

산속에 있는 구름 속 고택이란 뜻으로 '구름에'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리조트는 '행복전통마을'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운영을 맡는다. 영업을 해서 돈을 벌지만 직원들 급여와 관리·운영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수익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이다. 안동시 관계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경상북도, 안동시, SK그룹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만들었다"며 "행복전통마을이 5년마다 안동시로부터 위탁운영권을 맡아 운영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사회적 기업의 특성상 직원 채용도 모두 현지에서 이뤄졌다. 현재 직원은 11명으로 모두 안동시 주민이다. 연령대는 60대 1명, 50대 3명, 40대 3명, 30대 이하 4명 등이다. 앞으로 4명 정도가 더 고용될 예정이다.

리조트 운영은 호텔과 비슷하게 이뤄진다. 여행 가방을 각각의 고택까지 전달해주는 '도어맨 서비스'가 있고, 24시간 당직 지배인이 배치돼 있다. 이불은 손님이 바뀔 때마다 세탁을 해서 제공한다. 리조트 곳곳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이 배치돼 있어 보안을 책임진다.

호텔 등과 달리 고택이라는 점을 감안해 손님들에게 고택에 얽힌 이야기와 고택의 의미, 기능 등을 잘 전달해주는 데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를 위해 지난 8년간 안동 하회마을 인근 옥연정사를 관리했던 김상철씨를 지배인으로 데려왔다. 중요민속자료 제88호인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세운 정자로 유명하다. 김상철 지배인은 "고택은 단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