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이 출범할 때가 그랬다. 관료들을 향한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졌다. 공무원은 국회의원과 접촉하지 말라고 했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만남에서 이권 담합이 싹튼다는 유권자들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직업 공무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은 각 부처 사무차관 자리다. 정치인들이 모이는 장관 회의보다 중요한 정책이 사무차관 회의에서 결정된다고들 했다. 차관들이 결정하면 장관이라고 해도 밀어붙이지 못한다고 뒷말이 많았다. 그래서 민주당은 123년 만에 사무차관 회의를 폐지했다. 퇴직 관료들의 낙하산 인사도 1회로만 제한했다. 민심을 반영했다고 뿌듯해했다.

2년 뒤 동일본 대지진이 닥쳤다. 과연 민주당 정권의 공무원들이 국가적 재앙에 능력을 보여주었는가. 그들이 집권당의 관료 개혁 의지에 좋은 자극을 받아 충격에 빠진 국민을 구해내려고 힘을 다 썼는가. 실상은 정반대였다. 부처 간 업무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구호품이 지진으로 폐허가 된 현장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세월호 국회에서 장관에게 호통치는 목소리가 날카롭다. 공무원을 공박하는 발언을 듣고 있기가 짜증 날 정도라고 현장 기자들은 말한다. IMF 외환 위기 때도 똑같았다. 정치인은 관료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경제 관료들은 죄인이 됐고, 경제부총리와 장관은 검찰 수사를 받았다. 공무원 집단의 몰락이 그렇게 오는 듯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반격은 그 후 시작됐다. 그들에게 당한 쪽은 기업과 은행이었다. 30대 재벌 가운데 절반이 문을 닫았다. 5개 시중은행 중 지금껏 자기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은행과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형편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구조조정 대상이었던 대기업·은행 중에는 긴급 자금 지원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곳이 없지 않았다.

경제 관료들은 국민의 차가운 여론, 정치권의 공격을 의식하며 가혹하게 구조조정 작업을 밀고 갔다. 소수이긴 해도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관료 집단이 무서운 것은 자기들이 당하면 어디엔가 보복한다는 특수 인자(因子)가 혈관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입에서 '관피아(관료+마피아)' 단어가 튀어나왔다. 회초리를 휘두를 대상으로 공무원 조직을 꼽은 셈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관료 집단을 애지중지 키웠다. 외화가 없던 시절에도 미국 유학을 보냈다. 감찰의 서슬이 시퍼렇던 즈음 우수한 경제 관료 3명이 뇌물로 밀가루를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서도 덮으라고 했다. 그들은 나중에 청와대 수석, 경제부총리, 대형 공기업 사장으로 경제 발전에 공헌했다. 그렇게 성장시킨 박정희의 아이들이 이토록 무능한 존재로 전락한 것을 보고서 어쩌면 배신감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공무원 채용 방식을 조금 변경하고 낙하산 인사를 제한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뀔 것이라고 낙관해선 곤란하다. 임기가 45개월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이 괴물 같은 집단에 독한 매질 한다고 관청 공기가 확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그들이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서는지 감시하는 일이 더 중요해질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은 출범 15개월째 경마장 제1 코너를 막 돌고 있는 경주말이다. 커브 트랙에 들어서면서 헉헉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경마장을 덮고 있다. 제목 뽑기 좋은 '국가 개조론' '관피아 철밥통 척결'을 내걸어봤자 몇 달 뒤엔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라고 국민은 직감하고 있다. 한두 번 속아본 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정권 들어 여러 국가 현안이 풍선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때는 복지가 아니면 나라가 굴러가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결국 재정 절벽에 부닥쳤다. 경제 민주화 깃발도 경기가 풀리지 않아 어정쩡하게 접어야 했다. 올 들어선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이 마케팅의 신상품으로 떠오르는가 싶다가 곧 규제 철폐로 메뉴가 바뀌었다. 무엇 하나 매듭지어진 것 없이 국정의 우선순위가 몇 달 간격으로 변덕스럽게 바뀌었다. 이제 정치 마케팅의 최고 인기 상품은 '안전'이다.

만기 5년 계약직 대통령이 전 과목에서 100점을 받으려고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숱한 현안과 싸우며 매번 100점 답안지를 써낼 수도 없다.

대통령이 사과다운 사과를 하지 않은 데 대한 여진(餘震)이 어둡고 길게 남아 사과만 반복되고 있다. 그걸 만회하겠다고 할 수 없는 일, 하지도 않을 일을 약속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국민은 더 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관료들이 이것저것 긁어모아 준 100쪽짜리 두툼한 안전 대책을 내놓는 것보다 이것만은 확실하게 잘하겠다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 열쇠를 찾지 못하면 경주마는 2코너 커브를 다 돌기도 전에 주저앉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