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선임기자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다수리에 폐교(廢校)가 있다. 1999년 아이들이 떠나 문 닫은 다수초등학교다. 여기 5년 전 한 사내가 5t 트럭 여섯 대 분량의 이삿짐을 싣고 왔다. 그에겐 '미친 최광'이란 별호(別號)가 붙어 있다.

요즘 화제가 되는 게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진 작품이다. 그가 매일 5000컷씩을 찍는다는 말을 믿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10초에 한 번씩 셔터를 눌러도 14~15시간 걸리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한국의 10대 사진작가로 여러 매체가 인정한 최광호(崔光鎬·58)는 이 분야의 비공인 세계 최고일 것이다. 거의 자지 않고 하루 1만컷 이상을 촬영해 신제품 니콘카메라의 셔터 뭉치를 한 달 만에 박살 낸 전설이 있다. 그의 모토는 '사진이 일상(日常)을 통해 드러나면 일상은 사진이 된다'는 말로 요약된다. 셔터 누르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다. 치열한 주제 의식을 중시해 예쁜 사진만 추구하는 이들을 호되게 꾸짖기에 선배도 후배도 그만 보면 슬금슬금 꽁무니 뺀다.

강릉이 고향인 그는 고교시절 카메라를 마스터했다. 공부 대신 선배의 사진관에서 살았던 탓이다. 신구대에 입학하자마자 '심상(心象)일기' '바다기행'이란 제목으로 두 번 개인전을 연 뒤 작품 세계에 전기(轉機)가 왔다. 치매 걸린 할머니, 즉 생명이 빠져나가는 과정을 주제로 한 전시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했지만 지도교수가 반대한 것이다. 이어 일본 오사카예술대학과 미국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왔을 때 동생이 익사하고 말았다.

하루 1만컷 이상 촬영해 카메라 셔터를 박살 낸 전설 때문에 ‘미친 최광’이라 불리는 최광호 작가. 그는 최근 “세월호 참사의 기록을 남기겠다”며 진도로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삶과 죽음'을 테마로 정했다. 스스로 알몸을 드러내더니 어머니·장인·장모·누나까지 벗겼다. 그에게 걸리면 제자고 아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벗어야 하는데 그는 '자발적'이라고 주장한다. 결혼식 때 주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 질리게 하더니 본인이 주례 설 땐 신랑·신부에게 셔터를 눌러댔다. 차량이 질주하는 서울 광화문 거리에 뛰어드는가 하면 이화여대 앞 육교에서 점프해 변태(變態)로 오인받기도 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찼는지 그는 '포토그램'이라는 분야를 한국에 소개했다. 사람, 꽃, 깨진 유리병 등을 닥치는 대로 인화지 위에 올려 등신대(等身大)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사진의 '3대 불가능' 중 두 가지를 동시에 깼다. '현실의 크기를 작거나 크게 표현할 뿐 동일하게 할 수 없다' '복제 가능하다'는 두 가지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 그가 돌연 도시를 떠나겠노라고 선언했다. 최광호는 삶과 죽음의 영역을 인간에서 자연으로 넓혔다. '생명의 순환' '동행-평창' '흙으로부터의 시간 2011-2012' '마음을 청소하다' '해안선, 숨의 풍경' '부산참견록' 등 전시회를 연속 개최한 것이다.

그는 폐교에 작은 갤러리를 지어 전시회를 열고, 인근 초등학생들을 불러 사진 촬영과 인화 기법을 가르쳐주는 '재능 기부'도 한다. 어느 사이 무명 예술인이 하나둘씩 모여들며 다수리의 이름도 알려졌다. 그런데도 작품보다 트위터로 명성을 얻은 강원도 화천의 이외수와 달리 올해 폐교 임대가 끝나는 최광호는 평창과 다수리를 예술 마을로 만들고 척박한 땅에 갤러리로 문화의 향기를 퍼트린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쫓겨날 처지다.

사연을 들으러 다수리를 찾은 날 최광호는 부슬비 속에서 학교 주변에 심은 돼지감자를 캐고 있었다. 그에게 묻자 "폐교가 돈이 되는 걸 안 부자(富者)들이 몰려들자 군청이 생각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사진가에게 1년 2000만원 임대료는 벅차요. 더 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군청도 솔깃하겠지요. 하지만 5년간 쌓아온 게 아까워요. 부근 무이예술관, 달빛극장, 감자꽃스튜디오와 함께 평창군민에게 좋은 자산이 될 텐데…."

굵은 땀을 2시간 동안 쏟던 그는 옛 교실 한편에 만든 목욕탕에서 말끔히 변신하더니 뚜벅뚜벅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서울 종로에서 강의하고 진도(세월호 참사 현장)에 가려고요. 저를 찾는 사람들이 '다 어른들 잘못'이라는데 기록을 남겨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