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7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사원 옆에 있는 세인트마거릿성당에서 좌파 정치인 토니 벤(Tony Benn·1925. 4. 3~2014. 3. 14)의 장례식이 열렸다. 벤의 사망일로부터 장례식까지 2주간은 물론이고 장례식이 끝난 일주일 간에도 영국 언론에는 벤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기사의 문구 중 '좌우 모두로부터 같은 정도의 사랑과 질시를 받은 인물'이라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국의 가장 신랄한 국가보물(most trenchant national treasure)'이라는 것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이 문구는 중도우파 신문 텔레그라프의 논평에서 나온 말이니 더욱 놀랍다. 결국 영국의 지식인 중에서 우파든 좌파든 '영국 정치의 성자'라 불리던 벤을 심정적으로 존경했거나 존경할 수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감히 비판할 만한 용기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토니 벤을 표현하는 가장 간략한 묘사가 오스트레일리아 신문에서 나왔다. '영국 20세기 후반 정치인 중 가장 카리스마가 있었고,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고, 가장 영감적이고, 가장 불화를 초래하는 20세기 후반의 대중적인 인물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조문객은 길가에서 고인의 마지막을 보았다. 대처의 장례식이 거의 국장급에 달하는 정식 장례식이었다면 벤의 장례식은 가족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숫자의 조문객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였다. 이렇게 토니 벤은 영국에서는 전설적인 대중 정치인이었다. 현직 총리를 한 것도 노동당 대표를 해본 것도 아니다. 노동당 집권 시절 별 무게 없는 장관 몇 번 한 것이 전부다.

그를 표현한 말들을 보자. 좀 길다. "영원한 좌파의 상징, 마지막 진정한 사회주의자, 마지막 낭만주의 사회주의자, 샴페인 사회주의자, 네오 리버럴리스트, 연성좌파로 시작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경좌파로 변한 유일한 인물, 내각에 들어가서 더 강경좌파가 된 드문 정치인, 50년간 하원의원을 해서 노동당에서 두 번째로 긴 의원 역임, 2003년 2월 벤이 주도한 이라크 반전 런던 시위는 75만명이 참가해 영국 역사상 최대를 기록, 2006년 BBC의 시청자들이 뽑은 '나의 정치 영웅' 투표에서 대처 전 총리를 3%포인트의 차로 누르고 38%로 1등을 차지, 완벽한 계급의 배반자, 완강한 좌파."

더 보자. "저서 '사회주의를 위한 논쟁'을 써서 수많은 젊은이를 노동당으로 끌어들인 공신, 평생 일기를 써서 1600만 단어의 10권의 일기 출간, 나이가 들었으나 영원히 청춘인 듯 늙지 않는 노인(해럴드 윌슨 전 총리의 평), 벤자민 버튼처럼 시간을 거슬러 사는 기인, 반이스라엘주의자, 정치에 더 열중하기 위해 50년간의 하원의원을 그만둔 뒤 길거리에서 반핵운동·반전운동·반유럽연합·반신분증을 전개한 전직 정치인, 자신의 뜻에 따라 내부인으로부터 좌파 외부인으로 바뀐 유일한 정치인, 도덕적이고 소박하고 그리고 상식적인 사람, 중상층 출신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진 개혁주의자, 비국교도 극단주의자, 사생활로 한 번도 언론에 문제가 된 적이 없는 정치인, 절대 흔들리지 않는 신념, 자신의 당과 대치를 하면서도 당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드문 존재, 영국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기득권 세력에 대한 항구적인 가시 즉 비판가, 전후 영국 주류 정치인 중에서 가장 최면적이고 논쟁적인 인물, 나이 들어 길거리로 나서도 국보적인 존재로 바뀐 인물, 에드워드 히스 전 총리 이후 유일하게 의회도서관과 의원휴게실을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전직의원, 부자가 2년간이나 동시에 하원의원으로 일한 유일한 사람, 세계적으로 유명한 젊은이들의 글라스턴버리 페스티벌에 매년 초대받아 젊은이들에게 정치적 영감을 준 유일한 정치인…."

이제 그가 영국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들어보자. 영국 언론에 나온 벤을 칭송하는 글들을 소개해 본다. '여론조작 안 하고, 가짜 위문동정 없고 마음에 없는 말 안 하고' '벤 같은 인물이 주위에 있는 한 결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인간애라는 지도에 꽂힌 핀처럼, 우리를 땅에 붙이게 하고 안전하게 하고 그리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 '88세인데도 불구하고 현 정부 각료 전원보다 더 배짱이 있는 사람' '절대 자신의 말을 취소하거나 다르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코 듣지도 않으면서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거짓 동정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이 왜 의원이 되었는지와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는, 내가 일생을 통해 본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그에게는 영원한 친구가 없었고 영원한 적도 없었다. 대중의 입장에 서서 발언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한데도 결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 누구에게라도 부당할 경우엔 대들었고 언론에 노동당의 잘못됨을 지적해서 해당 행위라고 당내에서 난리가 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이 아닌 국민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음을 알았고, 그래서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원칙주의적 성격은 성장 환경과 관련이 있다. 어릴 때 아버지의 비서로부터 용돈을 받으려면 용돈의 용처를 모두 기록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행동시간표도 작성해야 했다. 그는 인간의 향락적인 면에 관한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음악, 미술, 문학에 대한 교육은 받지 않았다. 책을 읽으라고 독려받아 본 적도 없다.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옥스퍼드대학교를 들어가고 졸업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가 51살 때 처음으로 부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책을 주기 전까지는 그들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TV도 노년이 되기 전까지는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영화에 관심이 조금 있을 뿐 그것도 해피엔딩이어야 좋아했다. 스포츠, 건축, 요리는 물론 알코올, 옷, 자연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일기 쓰기는 집착에 가까웠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공개를 전제로 하는 일기를 자기 심정 그대로, 생각 그대로 솔직하게 쓸 수 있는지는 정말 큰 의문이다. 또 벤 같은 사회적 공인이 이렇게 자세하게 자신의 일상과 생각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평을 숨김없이 남기기도 정말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사후에 낸 것도 아니고 생전에 차곡차곡 발간되었다. 만일 그가 진실과 다른 사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적어 놓았다든지 변명으로 일관했다면 금방 들통이 났을 것이다. 그의 일기는 한 번도 논란의 대상이나 진위를 의심받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의 일기를 읽고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인지를 느낀다. 더군다나 그의 일기는 세상에 공개를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고, 편집자에 의하면 원본에서 필요에 의해 나중에 고쳐진 적이 결코 없다고 한다. 분명 이런 그의 생각이 공개되면 상처받을 사람도 있고 그를 미워할 사람도 있는데 그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사실을 적었다. 그래서 그를 가장 신랄한 비평가라 하는 이유이다.

영국민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매일 잠자리 들기 전에 일기와 그날 한 인터뷰, 발언기록을 다 끝내야 했다. 원칙주의자에다가, 틀리면 틀리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얘기하는 사람, 잘못하면 그의 일기에 등장해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지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것 같다. 그는 일기를 쓴 이유를 '이렇게 기록을 하다 보면 세 번의 자기 성찰을 하게 된다'고 했다.

벤은 살아생전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영화배우가 되어도 충분할 만큼 잘생긴 인물인데 나이가 들면서 더욱 멋있어졌다. 노년에는 구레나룻을 길러 멋을 더했다. 평생을 피운 파이프 담배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흑백으로 잡힌 그의 사진은 멋지게 넘긴 흰머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지는 파이프의 흰 연기로 인해 허무한 분위기와 함께 신비스러운 기운마저 느끼게 했다. 세월과 더불어 연륜이 쌓인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토니 벤이 영국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대중 편에 섰다는 점이다. 영국인의 지도자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지도자는 자신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도 동시에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 대중은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뭔가 신비로운 신분의 사람을 자신의 지도자로 좋아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영국인은 특수한 신분의 지도자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먹고살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숭고한 신념에서 정치를 한다는 아마추어적인 지도자형을 말이다.

토니 벤은 학벌, 경제적 배경 등 모든 것을 갖춘 '엄친아'였다. 벤은 이런 출신 배경을 싫어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하는 노동계급과 서민들과 다르게 자랐다는 것을 못 견뎌 했다. 벤의 조부와 외조부 둘 다 자유당 하원의원이었다. 아버지는 자유당 의원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 노동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벤의 둘째 아들도 4선의 현직 의원이고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하고 지금은 그림자내각의 사회 지방정부 장관이다. 이렇게 해서 벤의 가문은 4대째 의원을 배출했고, 3대째 내각 각료를 역임한 집안이다. 이제 5대째 의원 배출의 가능성마저 보이는 판이다.

벤의 모친 마거릿은 여권운동가였고 목사였다. 부인 캐롤라인도 교육운동가로 영국 교육제도 개선에 평생을 바쳤다. 토니 벤은 이렇게 모든 환경이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생활했다. 할아버지는 성공적인 출판회사를 세웠다. 지금도 출판사는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어 벤을 비롯해 모든 자손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신들의 뜻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기반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스쿨을 나와 옥스퍼드대학 철학정치경제과(PPE)에서 공부했다. 대학생 때는 출세의 보증수표인 옥스퍼드 학생회(Oxford Union) 회장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랑이 되고 정치적 자산이 되어 은근히 내세울 만한 것들을 벤은 평생 족쇄라고 여겨 숨기려고 노력했다. 우선 안소니 닐 웨지우드 벤이라는 이름에서 안소니를 토니(안소니의 애칭)로 바꾸고, 귀족 냄새가 나는 웨지우드(할머니가 웨지우드차이나를 개발한 영국 귀족 부자 가문)와 닐을 뺀다.

1950년 25세에 하원의원이 되어 당시 하원에서 '베이비 의원'이라 불리던 벤은 그후 연속 4선에 성공했다. 196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아 상원으로 가야 했다. 그 다음해 1961년 선거에서는 당선되어도 하원 활동을 못할 가능성을 알고도 브리스톨 남동구 선거구민들은 벤을 당선시켰다. 하원에서 활동하기를 원한 벤은 상원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귀족 칭호도 본인이 원하면 거부할 수 있도록 법 개정운동을 펼쳤다. 벤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3년 뒤 결국 당시 의회 내 다수당이던 보수당이 협조해 주어서 귀족법 개정이 성공했다. 법이 통과된 22분 뒤에 벤은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귀족 칭호를 거부하는 인물이 된다.

결국 벤은 16번 선거에서 당선되고도 15번 하원에 들어가는 이상한 기록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민에 헌신하기 위해 상원으로 가지 않고 하원에서 머문 토니 벤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만들어진다. 이는 윈스턴 처칠이 끝까지 상원으로 가지 않고 하원에서 의원 생활을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고 보면 토니 벤과 윈스턴 처칠은 비슷한 점이나 연관이 상당히 많다. 국회의원(처칠 64년, 벤 50년) 오래하고, 귀족 출신(처칠 공작 가문, 벤 남작 가문)인데 상원으로 안 가고 하원에서 끝내고, 담배(처칠 시가, 벤 파이프) 많이 피우고도 오래 살고, 세인트마거릿성당(처칠 결혼식, 벤 장례식)과 관련이 있는 점이다.

이런 토니 벤이 1970년대 들어서 강성좌파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과 의회 정치를 그만두고 대중운동가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연관이 있다. 그 이유를 자신의 내각 경험을 통해 얻은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토니 벤은 집권을 해서 각료가 된 이후 더 급진적이 된 유일한 경우이다. 벤은 영국이 표면적으로만 국민이 선출한 의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보았다. 거기에 비해 노동조합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황은 1976년 IMF(국제통화기금)에 의해 공공지출이 감축될 때 명확하게 드러났다. 대의민주주의의 실체는 시스템은 변하지 않고 있음에도 시스템 관리팀만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만일 이런 사실을 영국 국민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세상은 분명히 바뀔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벤은 진정한 권력은 의회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다. 의회 밖의 기득권 세력과 국민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본 것이다. 아마 이런 결론 때문에 벤은 의회를 뛰쳐나와 거리와 강당에서 국민을 상대로 직접 목소리를 높인 것 같다. 벤은 그래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운동을 조직했고 강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세 번의 총선에서 노동당이 연거푸 지자 토니 벤은 자신의 정당이 잘못 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노동당 개혁을 기치로 대표 자리에 도전했지만 참패한다. 노동당은 기존의 노선을 오른쪽으로 돌려 중도노선을 택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노동당 정책의 거의 제1조에 해당했던, 기간산업의 재(再)국유화 완전 포기를 선언하고 만다.

보수당은 만성적자이던 국영기업을 민영화해서 국민에게 주식을 평가액 이하로 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민영화된 국영기업의 주식을 사서 국민주주가 된 국민과 노동당원들마저 이제는 기간산업 국유화를 반대하게 된다. 또 보수당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던 서민임대주택을 저가와 저리 융자를 통해 지금까지 살아온 서민에게 소유권을 넘겨 사유화했다. 전통적 노동당 지지자였던 서민임대주택의 주민들을, 주택을 소유한 중산층이라고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보수당 지지자로 끌어들인다. 좌파들은 대처 정부가 이렇게 국민을 돈으로 사버렸다고 한탄했다. 결국 노동당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중도노선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제3의 길이라는 기치를 건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New Labour)의 지도하에 노동당은 정권을 잡는다. 이렇게 해서 토니 벤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땅' 좌파 정치인이 되고 만다.

벤은 마침내 블레어 정부가 들어선 지 4년 뒤인 2001년 총선에서 출마하지 않는다. 의원 활동은 정치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노동당이 토니 블레어라는 '대처의 아이들(Thatcher's Kids)'에 의해 능욕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한때 앞자리(front bencher·내각 각료)이던 노정객은 뒷자리(Back Bencher·평의원)에서도 밀려나 거리로 마이크를 들고 나서게 됐다. 보통 거리의 정치인이 총선 승리를 통해 제도권 정치로 진입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인물 벤자민 버튼처럼 시간을 꺼꾸로 산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과격해진 셈이다. 반전연합(Stop the War Coalition)의 의장이 되어 반전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벤은 2차대전 때 공군 조종사가 되었다. 전투기는 몰아 보지 못하고 제대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그는 나중에 "나는 그때 총검, 권총, 장총 모든 것을 다룰 줄 알았다. 만일 내가 그때 독일군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을 것이다. 나는 자유의 투사인가 테러리스트인가?"라고 물었다. 이런 본인의 경험을 통해 세상이 다 테러분자라거나 무슬림 독재자라는 평을 한 사담 후세인(전 이라크 대통령)이나 야세르 아라파트(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와 같은 인물들을 선입견 없이 만났다. 더 나아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같은 어떤 명분의 전쟁도 반대했다. 결국 2001년 의회에서 은퇴하고 나서 죽을 때까지 반전연합의 회장을 맡아 영국 전역으로 강연을 하고 다녔고 자신이 50년간 의원으로 머물렀던 웨스트민스터사원 앞에서 휴대용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인솔하기도 했다.

그러던 2009년 뇌졸중이 그의 모든 장정에 브레이크를 건다.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사자후를 터뜨리던 벤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변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가슴이 찢어진다. 지난해 여름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는 왠지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그냥 어느 순간에 스위치가 꺼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라고 했다.

그는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만났는데 만난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느꼈고 9일 만에 공원 벤치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그리고는 50년을 거의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았다. 나중에 그 벤치를 사서 노팅힐 집 정원에 두었는데 그녀가 죽은 후 에섹스에 있는 집으로 옮겼다. 그 벤치에 벤과 캐롤라인의 이름이 같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묻힐 거라고 했다. 벤은 부인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이 보였고, 결국 벤은 그녀의 죽음이 남긴 상처로부터 결코 해방되지 못한 듯 보였다고 기자는 썼다. 벤은 "남겨진 빈 공간을 결코 채울 수는 없지만 기억의 꽃으로 장식할 수는 있다(You can never fill the gap that's left, but you can decorate the gap with the flowers of memory)"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장례식에서 토니 벤의 자녀 네 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사는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 넷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 그의 사랑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보람되고 영감으로 가득 찬 오랜 삶과, 세상을 좀 더 낫게 바꾸어 타인들을 돕기 위한 그의 헌신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의 피가 푸르다고 여겼지만 그의 피는 평생을 통해 붉은색, 그중에서도 가장 붉은색이었다."

인터뷰에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항상 사람들을 격려해서 영감을 가지게 해 사람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일어나게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묘비는 '여기 토니 벤이 누워 있다. 그는 우리를 부추겼다(He encouraged us)'라고 써달라고 했다. 언젠가 그의 무덤이 완성되면 한번 가보고자 한다. 분명 그의 묘비에는 그렇게 쓰여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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