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 국가정보원의 간첩 사건 증거 조작에 대해 사과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관리 체계 허점이 드러나 국민께 심려를 끼쳐 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 또다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지난 14일 검찰이 "남 원장이 증거 위조 사실을 보고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하자 남 원장의 유임을 전제로 바쁘게 움직였다. 검찰 발표 직후 이 사건의 실무 책임자 격인 서천호 국정원 2차장(차관급)이 사의를 표명했고, 청와대는 이를 곧바로 받아들였다. 남 원장도 이날 "국정원 일부 직원이 증거 위조로 기소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데 대해 참담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다. 2차장 사퇴와 대통령·국정원장 사과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절차대로 진행된 느낌이다.

검찰 수사 결과 당초 국정원 주장과는 달리 국정원이 증거 조작범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증거 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하급 간첩 혐의자 한 명을 잡으려고 이런 황당한 무리수를 둔 것이 과연 고위급들은 전혀 모른 채 실무자 선에서만 이뤄졌겠느냐는 것은 상식의 물음이다. 증거가 없다는 검찰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해도 남 원장의 책임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국정원 요원들이 증거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하는 상식 밖의 범행을 저지르는데, 고위급들이 그 긴 기간 동안 까맣게 몰랐다면 국정원의 기강(紀綱)이 도저히 정보기관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졌다는 뜻이다.

남 원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겠다"며 "국정원 안에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쇄신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남 원장은 지난해 3월 취임 후 줄곧 '자체 개혁'을 강조하면서 국민에게 거듭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마다 국정원 개혁을 위한 팀을 만들곤 했다. 그러나 지난 1년여 국정원은 여전히 정치 사건에 휘말려 줄곧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렇게 되면 국정원장 경질을 포함한 대대적 인적 쇄신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국민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고,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남 원장이 경질될 가능성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남 원장 유임 이후'다. 이제는 이런 어이없는 행태가 되풀이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이 세계 정보 역사에 남을 망신에서 벗어나 대북 정보, 방첩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남 원장은 이날 "북한의 4차 핵실험 위험, 다량의 무인기에 의해 우리 방공망이 뚫린 엄중한 시기에 국정원이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어쨌든 기회는 다시 주어졌다. 남 원장이 이를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자신을 혁신하고 국정원을 진정한 국가 파수꾼으로 바꿔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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