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한 학원 상담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48)씨는 이른바 ‘돼지엄마’다. 요즘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돼지엄마란 신조어는 엄마 돼지가 새끼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듯 또래 학부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마를 일컫는 말이다.
아이들 공부법이나 학원 정보 등과 관련해 입담이 좋고 정보력이 뛰어나거나,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가 돼지엄마로 ‘추대’받는다. 김씨 역시 큰아들을 대학에 성공적으로 보냈다. 김씨는 일반 중·고교를 다닌 아들을 6년간 대치동 학원에 데리고 다닌 끝에 작년 대학 의예과에 입학시켰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 김씨는 아들이 다니던 학원의 상담실장으로 변신했다. 자신의 입시 노하우와 학부모들 사이의 영향력과 인맥을 높이 산 학원 측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들이 다니던 학원이 분원을 열면서 같은 돼지엄마인 이모(49)씨가 분원 원장을, 자신이 상담실장을 맡았다.
이 원장 역시 아들을 수도권 4년제 대학 의예과에 보냈다. 김씨는 “‘대치동 학원 상담실장 자리에 앉았다’고 하면 으레 자녀가 의예과(자연계열)나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인문계열) 등 최상위권 학교에 입학한 줄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원장도 기자에게 “평소 다른 학부모로부터 대입 상담 부탁을 많이 받았다”며 자신이 돼지엄마에서 학원장으로 변신한 배경을 설명했다. “밥 한 끼 얻어먹고 조언해준 것치곤 결과가 괜찮았죠. 한번은 공대 갈 뻔한 A군을 의대에 보낸 적도 있어요. A군은 2013학년도 수능에서 국어 성적이 좋지 않은 반면 영어와 수학 성적이 높게 나왔어요. 국어 반영 비율이 낮은 인제대 의예과 정시모집 전형이 딱 맞아 지원을 권했죠. 아직도 A군은 제게 고맙다며 안부를 전하곤 해요.”
요즘 대치동 학원가에는 이들처럼 돼지엄마에서 직접 학원 관계자로 변신한 학부모가 적지 않다.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대학에 보낸 후 그동안 대치동에서 갈고닦은 입시 노하우를 썩히지 않고 주로 학원의 상담실장 등을 맡아 아예 대치동 학원가에 자리를 잡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 학부모들의 변신 배경에는 돼지엄마의 파워가 자리 잡고 있다. 명문중·고교 학부모 사이에서 돼지엄마의 권력은 꽤 큰 편이다. 돼지엄마가 추천하는 학원엔 학생이 모이고 반대의 경우엔 원생이 떨어져 나간다. 특히 입소문 외 홍보 수단이 없는 대치동 중·소형 학원에선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신진상 지공신공 입시연구소장은 “일부 돼지엄마는 돈을 받은 학원에 원생을 몰아주는 등 모종의 거래를 하더라”고 말했다. 강남 지역에서 10년 이상 강사 생활을 해 왔던 최성열 분당제일학원 부원장은 “(학생을 몰아준) 학원에 투자금을 대는 등 운영에 깊이 개입하는 돼지엄마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돼지엄마의 파워를 학원들이 놓칠 리가 없다. 대치동 학원가에 돼지엄마 상담실장이 나타난 것은 꽤 오래전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돼지엄마 상담실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대치동 학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신진상 소장은 “중년 여성이 원장으로 앉은, 소위 ‘아줌마 학원’에 돼지엄마 실장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돼지엄마 상담실장은 최근 들어 확산되는 추세다. 다시 대치동 학원가가 뜨는 분위기에다 돼지엄마 상담실장의 장점이 입소문이 나면서 학원들이 돼지엄마 모시기에 나선 결과다. 학원 관계자들은 “돼지엄마 상담실장들은 본인의 인맥을 활용해 학생을 유치할 뿐 아니라 수요자인 학부모의 고민을 잘 알아 상담에 능하다는 이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대치·분당·평촌 등에서 대입 학원을 운영하는 김희옥 영진학원 대표는 “돼지엄마 상담실장은 학부모 상담 시 자녀가 없거나 미혼인 실장이 보지 못하는 면을 긁어주더라”고 말했다. 돼지엄마는 학원 입장에서 볼 때 마케팅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멀티플레이어형 인재인 셈이다.
돼지엄마 상담실장들이 받는 보수는 천차만별이다. 신진상 소장에 따르면 상담실장의 기본급은 낮으며 새로운 반이 형성될 때마다 성과급을 받는 구조다. 김희옥 대표는 “학부모가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이유는 돈이 다가 아니다”라며 “엄마 마음으로 후배 학부모를 이끈다는 보람 역시 일에 큰 동기가 된다”고도 했다.
돼지엄마 상담실장 확산 현상은 대치동뿐 아니라 서울 노원·양천구, 경기도 평촌·분당 등 수도권 사교육 중심지에서도 볼 수 있다. 최미경 영진학원 평촌분원 상담실장은 아들을 뒷바라지하다가 2012년 김희옥 대표에게 발탁된 경우다.
최씨의 큰아들은 평촌 인근 외고를 졸업한 후 한양대에 재학 중이고 작은아들은 청심국제고 3년생이다. 최씨는 청심국제고생이 많은 대치동과 장남이 졸업한 평촌 인근 명문고 양쪽 소식에 훤한 ‘마당발’이다. 실제로 영진학원 평촌분원생 중 3분의 1가량은 최씨가 직접 유치한 학생들이다.
“미국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아들에게 맞는 강사를 찾다가 이 바닥에 뛰어들었어요. 아이는 2009년 청심국제중에 편입했어요. 대부분 특목중·고교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업 수준에 맞춰 몰려다녀요. 수준이 비슷하지 않으면 팀 과외에 끼워주지도 않죠. 결국 제가 총대 메고 대치동 강사 조사에 나서서 아들의 과외 팀을 꾸렸어요.”
그가 실장 영입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도 “고 3 아들의 공부에 도움될 것 같아서”였다. 상담실장의 주 업무 중 하나는 학원 강사 선발이다. 최씨는 강사의 공개 강의를 보고 급료를 책정하는 등의 일을 도맡아 한다. 간혹 눈에 띄는 강사의 수업은 아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최씨의 아들은 영진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실장의 자녀는 장학 혜택을 받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대치동 학원가를 이용하는 엄마 대부분은 유명 강사의 프로필을 쫙 꿰고 있어요. 전 실장 업무를 보면서 강사 정보에 공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됐죠. 여러 사례를 보면서 선생님 보는 안목이 생긴 게 아들 공부에 가장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를 테면 강남대성 등에서 유명 강사를 모셔와도 수강생 모집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반대로 이름 없는 강사가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하고요. 특히 수학 등 단기간에 성과가 나지 않는 과목 수업이 강사 선호도 편차가 커요.”
돼지엄마 실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학원 관계자도 있다. 대치동 B학원장은 ‘전문성의 부재’를 지적했다. “자녀 한둘 정도 대학에 보낸 경험으로 다른 학생을 지도했다간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C학원 대표는 “일부 돼지엄마 실장이 학원계의 물을 흐린다”고 말했다.
몇 달 동안 여러 학원에서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 돼지엄마가 직접 학원을 차리면서 자신이 미리 알아둔 학원 강사 영입비 등 정보를 악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돼지엄마가 ‘D학원보다 돈 더 주겠다’며 꼬드기는데 어떤 강사가 마다하겠어요? 결국 몸값 올린 강사한테만 득이 된 꼴이죠. 이런 경험이 되풀이되다 보니 돼지엄마 실장을 좋게만 바라볼 순 없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