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아메리칸익스프레스, GE, 블랙록….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에 지명된 스탠리 피셔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 명단이 쟁쟁하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미국 최대 신용카드 회사 중 하나, GE는 미국 최대 제조업체, 블랙록은 4600조원 안팎을 굴리는 세계 최대 자산 운용 회사다.

피셔가 의회 청문회를 통과해 보유 주식 매각으로 수백억원을 손에 쥐든 말든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피셔의 투자 성향이다. 그는 미국의 우량 주식을 대거 갖고 있다. 그가 FRB에서 결정을 내릴 때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작동할 원칙이 무엇일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 직업적 의무를 떠나 개인적 투자 패턴만 보더라도 정책이 미국 기업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미국민에게 무슨 파장을 미칠 것인가부터 짚어볼 것이다.

피셔가 한국·인도 같은 다른 나라에 미치는 파문(波紋)에는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피셔는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였다. 그는 한국에 턱없이 높은 고금리 정책을 요구해 회사채 금리가 30%까지 치솟았다. 피셔는 금융회사 폐쇄와 부실기업 부도 처리를 무리하게 강압(强壓)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우리에게 밀어붙인 정책의 틀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론은 나중에 내려졌다. 우리도 그런 치욕을 딛고 일어섰다. 하지만 피셔는 자기가 던진 돌이 주변 국가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는 고민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은 지워질 수 없다.

그런 피셔의 이미지 위에 피셔를 부의장에 추천한 옐런 FRB 신임 의장의 발언을 얹어 보자. 옐런 의장은 지난주 의회에서 "지금 시점에서 미국 경제에 큰 위험은 없다"고 했다. 그 무렵 신흥국들의 혼란이 한창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옐런의 발언을 '신흥국들의 동요는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옐런이 '신흥국을 쌀쌀맞게 대했다(cold shoulder)'고 했다. 어느 쪽 해석으로 보나 FRB의 새 콤비는 미국의 정책이 다른 나라에 어떤 피해를 안길 것인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둘 다 두뇌와 심장에 미국 중심주의가 박혀 있는 인물이다.

찜찜한 것은 지금의 경제 상황이 20년 전과 닮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1994~1995년 '강한 달러' 정책을 앞세워 통화 공급을 줄이더니 곧 금리를 인상했다. 그 날카로운 파편은 멕시코로 튀었다가 태국·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세계에 연쇄적인 '금융 폭탄' 테러를 안긴 셈이다.

사실 시장은 그때보다 더 불안정하다. 이 세상을 떠도는 달러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월드달러'는 2008년 2조달러 언저리에서 7조달러가 돼 3.5배로 팽창했다. 세계 외환시장에서 매일 거래되는 금액은 2001년에 비해 4배 이상 늘었다. 파생금융상품 거래도 13배 크기로 폭발했다. 1997년에 1t짜리 바위가 우리 머리 위에 떨어졌다면 앞으로는 그보다 몇 십 배 더 큰 암석(岩石)이 덮칠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면서 '신경제(新經濟)'를 세일즈했다. 신경제 5개년 계획도 내놓았으나 '신경제가 뭐냐'는 조롱을 듣곤 했다. 그러더니 해가 바뀌어 199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개혁과 세계화로 재도약'을 들고나왔다. 세계화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치안 서비스까지 세계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부터 세계화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국민은 세계화란 해외여행 많이 가는 기회가 될 걸로만 알았다. 관료들은 어디서 지뢰가 터질지 제대로 점검해보지 않은 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선진국 클럽 회원권으로 포장해 가입을 서둘렀다. 당시 일본과 중국은 미국의 금융정책 전환에 따라 고환율 정책을 펴면서 우리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으나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세 글자에 꽂혀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신경제에서 세계화로 방향을 틀었다가 OECD에 가입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외환 위기 참사를 맞았다.

지난 1년 창조경제가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 혁신 3년 계획'을 내놓겠다고 예고했고, 드디어 다음 주 그림을 공개할 모양이다. 그것이 단지 정치적 분위기 전환용이라면 아무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국익(國益)만 앞세우는 인물들이 자금 흐름을 바꾸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내용이라면 또 한 번 국가적 참변(慘變)을 예약하는 꼴이다. 집권 첫해를 갈팡질팡 방황하다 급히 그려낸 습작품이 아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