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김기환(82) 박사는 미국 버클리 같은 대학에서 13년간 경제학을 강의했다. 1976년 귀국한 후 22년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상공부 차관, 통상대사를 맡으며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에 참여했다. 김 박사가 두 달 전 '한국의 경제 기적-지난 50년 향후 50년'(기파랑)을 내놓았다. 그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달러 한 푼이 급하던 우리나라에 IMF 구제금융을 끌어와 급한 불을 끌 수 있도록 해준 1등 공로자다. 이 책에는 자기 자랑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의 김대기(58)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달 '덫에 걸린 한국 경제'(김영사)를 냈다. 김 박사의 책에 비하면 감정적 표현이 많다. 33년간의 경제 관료 생활, 7년간의 청와대 비서실 근무에서 느낀 소감을 써내려갔다. 책에 등장하는 일화들을 보면 관료 출신의 조심성 많은 처신은 포기했다. 서문(序文)에서 '관련된 당사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주변의 만류도 뿌리쳤다고 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쓴 책이다.

정덕구(66) 전 산업자원부 장관도 옛 재무부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관료 출신이다. 정 전 장관은 경제연구소와 대학에서 정책 아이디어를 다듬어 온 전문가 14명과 함께 새해 '한국 경제, 벽을 넘어서'(21세기북스)를 내놓았다. 2014년을 경기 회복의 전환점으로 삼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세 책의 저자들은 경제정책의 현장에서 지휘관 내지 정책 제조자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한국 경제가 선진국 문턱에 도달해 있다는 공통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도 똑같은 진단서를 끊었다. 김기환 박사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했고, 김대기 전 수석은 '덫에 걸렸다'고 했다. 정덕구 전 장관의 책에는 '벽'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등장한다. 집필자들은 모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듯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을 말하고 있다.

이런 폐쇄공포증이 발병한 발원지(發源地)는 어디일까. 성장 열차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춰 있는 역(驛)은 어느 곳인가. 문어발 재벌들이 그 열차를 붙잡고 있는가, 파업을 일삼는 노조가 가로막고 있는가. 아니면 촌티를 못 벗는 금융인가, 복지 혜택을 더 달라고 투정하는 국민인가.

김대기 전 수석은 정책의 중심이 행정부에서 입법부로 넘어가고 있다고 단언했다. "국회의원들이 공무원을 직접 불러 업무 지시까지 하는 상황이다. 공무원에게 국가보다는 개인의 문제가 우선이다." 정덕구 전 장관도 "국가와 공공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면서까지 헌신적이었던 관료 사회의 행동 윤리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회 권력은 막강해진 반면 공무원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추락했다는 증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성장 엔진에 새 불씨를 집어넣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우리 경제에 성장 에너지를 충전해줘야 할 정거장은 청와대와 국회로 압축된다. 대통령 5년 단임제(單任制)를 4년 중임제(重任制)나 다임제(多任制)로 바꾸고, 국회가 법안을 신속 처리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국회도 미국처럼 상원과 하원으로 나누자고 했다. 경제 정책을 실행해 본 경험자들이 경제를 위해 1987년 헌법 체제를 수정하자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권은 자기들이 성장 열차를 멈춰 세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국회는 투자를 막는 규제 법안을 남발해 벽을 더 높게, 더 두껍게 쌓아 올린다. 의사 결정을 미루는 것을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행동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청와대는 해야 할 인사를 몇 달씩 지연시키고 있다. 국민이 도대체 실감하지 못하는 '창조경제'에도 청와대 사람들만 도취돼 있는 듯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침체 원인을 추적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범인 중 하나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정치'였다. 일본 정치는 디플레이션, 저성장, 고령화 같은 국가 현안에 대책을 제때에 마련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다. 경제 불황에 정치마저 장기 침체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 사이 국가 경제는 중국에 밀려났다. 정권은 한때 민주당으로 넘어가더니 이번엔 정반대로 아베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서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우리가 성장 엔진을 재가동하지 못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취업 실패, 해고자, 비정규직 같은 낙오자 집단이 전체 국민 가운데 3분의 1을 넘어 절반 선(線)을 향해 팽창해가고 있다. 일본 정치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경제 불황에 정치 불황이 겹쳐 장기화되면 10년 뒤엔 이 나라가 어디쯤 서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