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오석 경제부총리는 22일 신용카드사들의 고객 정보 유출 사고에 대해 "소비자들도 정보 제공에 다 동의해 주지 않았느냐"고 했다. 이어 23일엔 대외장관회의에서 "금융 소비자의 96%가 정보 제공 동의서를 잘 파악하지 않는 불합리한 관행이 있다"면서 "금융 소비자도 꼼꼼하게 동의서를 살펴보는 등 좀 더 신중할 필요성이 있다"고 전날과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정보 관리 실패의 책임이 고객 쪽에도 일부 있다는 지적이다.

현 부총리가 한 번이라도 직접 카드 발급 신청을 해봤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면 창구 직원이 신청서에 형광펜으로 표시해 주는 대로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 등 20여개에 이르는 신상 정보를 적은 후 개인 정보 활용 동의서에 서명해야만 한다.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아예 신청조차 되지 않으니 고객이 문장을 꼼꼼히 따져 볼 이유가 없다. 현 부총리가 말한 '불합리한 관행'이란 고객이 동의서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금융회사들이 강압적으로 고객 정보를 요구하는 현실이다. 고객이 정보 제공에 동의하는 것도 금융회사가 정보를 잘 쓸 것이라는 선의(善意)를 믿고 한 것이지 범죄에 악용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누가 동의했겠는가.

현 부총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지고 걱정만 한다"고도 했다. 이번 사태 이후 신용카드를 해지하거나 재발급을 요구한 고객이 벌써 300만명을 넘는다. 정보가 범죄에 이용될까 봐 걱정해온 청와대 비서실장·안보실장을 비롯한 1500만 고객도 졸지에 어리석은 사람이 됐다. 현 부총리는 사고의 파장을 걱정하며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엄하게 물어야 한다"고 했던 대통령에게도 "걱정하고 문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이웃집 젓가락 숫자까지 알고 지내던 과거의 촌락(村落) 공동체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전화번호를 파악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도 불편해할 만큼 프라이버시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로 변했다. 현 부총리는 피해를 전액 보상하겠다는데도 그 많은 사람이 왜 카드 계약을 해지하거나 재발급받으려고 쫓아가는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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