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1990년 중·후반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이후 시장화가 급속도로 진행됐고 지금은 과거 동유럽이나 소련, 개혁·개방 당시 중국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된다. 북 주민의 80% 이상이 각자도생을 위해 장마당 등에서 비공식적 경제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시장경제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남북 통합 시 사회주의 배급 경제 체제에서 살아온 북한 주민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北 노동당원도 68%가 장사 경험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9년 인구 통계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북한의 16세 이상 인구(1737만명) 중 83%(1448만명)가 시장을 통한 '비공식적'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기근 피해가 극심했던 함경남도는 시장화 비율이 93%에 이르고, 배급 경제가 가장 잘 돌아가는 평양조차도 시장화가 56%에 이르렀다.

북한 주민들이 작년 9월 평양에서 열린 가을철 국제상품 전람회에서 '판형 컴퓨터(태블릿 PC)'를 작동해보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13년 북한 이탈 주민 의식 및 사회변동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의 70% 이상이 '북한에서 장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비교적 특권층인 노동당원 출신도 68%가 장사를 해봤다고 했다. 특히 30대 92.3%, 40대 88.2% 등 젊은 층으로 갈수록 장사 경험이 많았다.

탈북자들은 소매 장사(37.2%), 외화벌이(11.1%),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파는 '되거리 장사'(8%), 일용직 노동(7.1%) 등이 주수입원이었다고 했다. 협동농장이나 공장 노동 등을 통해 국가에서 주는 공적 월급이 주수입원이었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전체 응답자의 42.2%는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생활비가 '0원'이라고 답했다. 반면 장사·부업 등 사경제를 통한 가구 수입이 '100만원 미만'이라고 답한 사람이 13.2%, '50만원 미만' 13.7%, '30만원 미만' 31.7%, '10만원 미만'이 16.6%였다. 100만원 이상이라는 응답도 15.1%나 됐다.

북한의 공식 월급과 시장을 통한 비공식 수입표

주민 10명 중 8명이 국가로부터 1만원도 못 받는 반면 7명 이상이 시장에서 10만원 이상을 벌고 있다는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북한 주민은 자기 소득의 71%를 시장에서 얻는다"고 말했다. 주민이 시장에 내다 파는 상품은 텃밭 등에서 얻은 과일·채소, 축산·어업 활동을 통해 얻은 잉여 생산물, 집에서 만든 식료품, 국영 기업소에서 훔친 생필품, 밀수품, 구호물자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업종과 방식도 다양화하고 있다. 북한 사정에 밝은 정부 소식통은 "영리 목적 소유가 금지된 차량이나 선박을 개인이 국가기관 또는 기업소로부터 임대받아 운영하고 수익의 10~50%만 해당 기관에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 방식이 유행 중"이라고 했다. 장마당 상인들은 매출 증대를 위해 끼워 팔기, 할인 판매, 휴대폰·오토바이 등을 이용한 배달 서비스 등 판촉전도 활발하다고 한다.

北 사업체 50만개… 금융도 변화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북한엔 현재 약 50만개 사업체가 있다. 이 가운데 40만개는 식당·이발소 등 서비스업 소상공업체이고 제조업·무역업체는 10만개 정도라고 한다. 북한에 사기업은 있을 수 없지만 국가기관에 수익의 일정 부분을 내는 대가로 위탁 운영권을 받는 방식이다. 상점 주인과 노동자, 수산업 선박 소유주와 노동자 등 사적(私的) 고용 관계가 생겼다.

최근에는 비공식 금융시장도 나타나고 있다. 장마당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일명 '돈주(錢主·사채업자)'들이 등장,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돈주들은 고리대금업 수준을 넘어 상인들의 무역 대금 결제를 대행하거나 국가기관과 기업소의 무역 허가권을 임차해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도 최근 경제특구를 추진하면서 상업은행법을 제정, 공장이나 기업소가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조봉현 연구위원은 "북한은 개성공단 등 남북 경협을 통해 시장경제를 경험했다"며 "통합 이후 5년 내에 북한이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남북 통합 시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모델을 채택하겠지만 통합 초기에는 북한이 겪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는 유럽식 모델을 일부 혼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