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김)현수랑 같이 다녀도 사인 요청은 제가 좀 더 많이 받아요. 인기가 생긴 거겠죠?"

두산 투수 유희관(27)의 눈과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9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직전에 받은 일구상 신인상 트로피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동안 시상식, 인터뷰로 정신이 없었어요. (봉사활동으로) 김장도 처음 해봤네요. 바빠서 매니저라도 둬야겠어요."

유희관은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재밌는 얘기를 풀어냈다. "어렸을 때 동네 회갑 잔치마다 가서 김흥국의 '호랑나비' 부르고 개다리춤 추고…. 끼가 넘쳤죠. 어른들이 '너 연예인 해라'고 할 정도였죠."

'느림의 미학'으로 다시 태어나다

유희관은 올해 10승(7패·평균자책점 3.53)을 올리며 야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9년 데뷔 후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그가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유희관은 시속 150㎞를 넘나드는 빠른 공이 판치는 프로야구에서 130㎞대 느린 직구로 살아남았다. 그가 밝힌 자신의 최고 구속은 시속 138㎞다. 일명 '아리랑 볼'처럼 큰 포물선을 그리는 70㎞대 초(超)슬로커브도 선보였다.

두산 유희관이 두산 마스코트 ‘철웅이’ 옆에 서자 구단 관계자들은 “역시 유대세(유희관이 대세)야. 마스코트와 싱크로율 100%네”라며 웃었다. 유희관은 “철웅이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두산의 중심 선수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유희관의 야구 인생도 느린 공을 닮았다. 2008년 중앙대 시절 대학야구선수권 MVP와 우승을 거머쥔 예비 스타였지만 프로에서는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줄곧 불펜에서 뛰던 그는 2010년 상무에 입단한 뒤 2군 무대에서 선발로 활약하면서 뒤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 야구 인생은 시속 70㎞ 커브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느리고 돌아가지만,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공처럼 언젠가 성공할 거라고 믿었거든요."

팬들은 그에게 강속구 투수를 뜻하는 파이어볼러(fireballer)의 반대 의미로 모닥볼러(모닥불+볼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찬사도 뒤따랐다.

우승 못해서… 올 시즌은 90점

유희관은 정규 시즌의 기세를 포스트 시즌까지 이어갔다. 생애 첫 가을야구였던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21과 3분의 1이닝) 2실점으로 활약하며 플레이오프 MVP(최우수선수)까지 차지했다. 주장 홍성흔과 함께 3차례 미디어데이에 개근하며 화려한 입담도 자랑했다. "박병호(넥센)는 무섭지 않다" "PO는 4차전에서 끝내겠다" 등의 말로 상대를 자극했다. 실제로 유희관은 준PO에서 박병호(넥센)를 6타수 무안타로 묶었고, LG와 벌인 PO 4차전에 선발로 나서 승리를 따내며 시리즈를 끝냈다.

베테랑처럼 당당하던 유희관에게도 첫 한국시리즈 무대는 녹록지 않았다. 삼성과 벌인 한국시리즈 3차전 땐 패전투수가 됐다.

"원정 1, 2차전에서 이긴 뒤에는 우승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3차전에서 제가 일찍 물러나고 지니까 조금씩 분위기가 넘어갔죠.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올해 개인 성적은 만족하지만, 우승을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 90점만 주고 싶습니다."

억대 연봉도 기대

유희관은 두산의 올 시즌 준우승을 "신·구 조화 덕분"이라고 말했다. 최근 김선우 등 베테랑이 팀을 나간 상황에서 그는 팀의 2014시즌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버팀목이 돼준 형들이 나간 게 아쉽지만, 프로가 정글이라면 세대교체는 자연의 섭리죠. 송일수 신임 감독님을 포함해 남은 선수단이 새로 뭉쳐 내년엔 최강자로 우뚝 설 겁니다."

정글과 같은 프로에서 살아남은 그의 올해 연봉은 프로 최저 연봉보다 단 200만원 많은 2600만원이었다. 유희관은 내년 몸값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1억대 연봉 진입을) 기대하고 있죠. 그래서 요즘 구단 분들 만나면 90도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다음 시즌 각오를 물었다. "이번에 시상식 많이 갔어도 정작 골든글러브에는 못 올랐잖아요. 내년에 팀은 우승, 저는 골든글러브에 도전할 겁니다. '신데렐라 시즌 2'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