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주간

전셋값이 치솟는다. 통계(전세 가격 지수)를 보니 2009년 76이던 것이 지금은 103.5다. 그새 많이 올랐다. 이렇게 오른 이유가 처음에는 전셋집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금리가 떨어지니 다들 전세를 월세로 바꾼다고 했다. 월세와 전세를 섞은 반(半)월세 집이 많아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요즘 등장한 논리는 다르다. "젊은 사람들이 누가 집을 삽니까. 더 떨어질 건데 뭐." 어느 부동산 전문가가 내뱉은 말이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목돈을 투자해 집을 사두면 자산은 축소된다. 그 돈을 전세 보증금으로 맡겨두면 원금은 보전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자기 자산을 지키기 위해 전셋집을 더 찾고 있다면 중요한 변화다. 이것은 부동산 시장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나라 경제를 흔들 수 있는 흐름이다.

지금 이 순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라도 지켜보려는 몸부림은 벌써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강남 아줌마들도 돈을 안 쓰네요." 서울 강남의 번듯한 백화점 사장이 투덜거렸다. 엄살인 줄 알았더니 "외환 위기 때(1998년 전후)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많은 입점 업체가 세일 기간이 아닌데도 세일 가격으로 팔고 있다고 했다. 전국 소매 판매 지수는 작년 12월 114.2를 찍고 지금은 107.5로 추락했다. 소비 심리 지수는 2009년 10월 119가 꼭짓점이었다. 이건 올 10월 106까지 떨어졌다.

20년 전 도쿄 번화가인 긴자 한복판에서 아오야마라는 회사가 남자 기성복 한 벌을 2500엔에 팔았다. 네 식구가 쇠고기 덮밥집에 한 번 덜 가면 아빠에게 근사한 양복을 선물할 수 있었다. '가격 파괴' '원가 파괴'를 알리는 두툼한 광고 전단이 조간신문에 끼여 배달됐으나 일본인들은 지갑을 닫았다. 집값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며 갖고 있는 현금, 정기예금을 지켜야 했다. 20년 불황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일본 정부가 일본이 불황 속에서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다고 인정한 것은 그보다 2년 뒤였다.

사람들은 먼저 행동한다. 시장도 불황을 예고한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항상 시장보다 늦고 정치권은 거기서 몇 발자국 더 뒤처진다. 우리 경제도 이미 그런 사이클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불길한 징조가 백화점이나 골프장 같은 몇 곳에서 불쑥 불거진다고 호들갑을 떨 수는 없다. 2011년 9월 이후 26개월 동안 소비자물가가 하락한 달이 11번이다. 작년에 소비자물가는 2.2% 상승했지만 올해는 0.9% 상승에 머물러 있다. 생활 물가지수도 26개월 사이 12번 떨어졌다.

어느 나라든 정책 당국자가 중시하는 것은 근원(根源) 인플레 지수다. 가격 변동이 심한 농산물이나 석유류를 빼고 핵심적인(Core) 상품과 서비스 가격의 변화를 본다. 이 근원 물가는 작년에 1.6%, 올 들어서는 0.4% 상승에 머물러 있다. 어떤 물가 지수로 보나 한국은행이 목표로 설정한 3% 물가 상승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저물가 경제다.

과거 석유 파동, 부동산 폭등 같은 인플레 시대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가 하락을 나라가 잘 굴러가는 증상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경제에는 인플레보다 디플레가 더 나쁘다고 결론을 내렸다. OECD 회원국들은 평균 2% 인플레를 목표로 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물가 하락 20년에 지칠 대로 지친 일본은 아베 정권이 2% 인플레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 정도가 됐다.

모두들 저성장과 투자 부진을 걱정한다. 하지만 저성장보다 무서운 것은 물가 하락에서 빚어지는 디플레이션이다. 디플레가 오면 기업과 국민은 더 움츠러든다. 오늘 하려던 쇼핑도 값이 더 떨어지는 다음 달이나 내년으로 미룬다.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진취적인 실험은 사라지고 손에 쥔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방어적 행동이 사회를 지배한다. 경제가 계속 추락할 것이라는 국민병(病)이 도지면 어떤 경기 부양책도 먹히지 않는다.

우리 경제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사람들은 큰 지진에 앞서 본능적으로 바빠지는 날짐승처럼 뭔가 닥쳐올 불행에 대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층이 두꺼워지면서 "이대로 가는 게 좋다"며 물가 하락을 반기는 여론도 커질 것이다. 국민 여론은 보수화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히틀러나 아베 같은 정치인들이 등장하게 되는 경제적 배경도 모두 디플레지 인플레 상황이 아니다.

1~2년 지나 디플레 국면으로 진입한 뒤 그때에야 정부가 대책을 들고나오면 이미 적정한 대응 시기를 놓치게 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디플레이션 시대가 왔다고?" 하고 반문할 무렵이면 우리 경제가 웬만한 처방으로는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