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산업부 과학팀장

"당신은 나와 다른 소를 쫓고 있고, 그 소는 아마 이 세상에선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서 당신의 인생은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걸.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바로 그런 당신의 운명이었어요."

이문열의 소설 '들소'에서 주인공은 사냥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소에 짓밟힌 자'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권력자 '뱀눈'의 여자가 된 첫사랑 '초원의 빛'은 그에게 "자신이 쫓는 소는 풍요와 안락의 소"라며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주인공은 불구자들이 모여 일하는 동굴에서 사냥 도구에 무늬를 그려주고 대가로 사냥한 동물의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첫사랑의 비수 같은 말 한마디에 그는 잊었던 자신만의 소를 다시 기억해냈다. 그는 가족을 떠나 다시 동굴로 들어가 들소를 그린다.

작가는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을 썼다. 그렇다면 실제로 동굴벽화는 누가 그렸을까. 이달 초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딘 스노 교수는 지금까지 학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그린 주인공은 '소에 짓밟힌 자'와 같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란 것. 그동안 남성 사냥꾼들이 자신의 사냥 기록을 남기거나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동굴에 들소와 순록 등을 그렸다는 주장이 정설로 통했다.

스노 교수는 십여년 전 영국 센트럴랭커셔대 존 매닝 교수의, 성호르몬 때문에 남녀의 손가락 비율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를 접했다. 손가락 길이는 태아 시기에 결정된다. 약손가락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집게손가락은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는다. 덕분에 남성은 약손가락이 집게손가락보다 길고, 여성은 두 손가락이 거의 비슷한 길이란 것.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스노 교수는 바로 책장에서 40년 된 동굴벽화 도감을 꺼냈다. 스페인과 프랑스 동굴벽화에는 동물과 사람 그림 외에 손도장도 다수 발견됐다. 손을 벽에 대고 손가락 사이에 물감을 뿌려 만든 것이었다. 매닝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스페인 북부 엘 카스티요 동굴벽화의 손도장은 명백한 여성의 손이었다.

당장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굴로 달려가 벽화에서 모양이 선명한 손도장을 32개 찾았다. 이를 오늘날 유럽인의 손 길이, 손가락 사이의 비율 등과 비교해 성별을 가려냈다. 놀랍게도 32개 중 24개가 여성의 손이었다. 성인 남성의 손은 3개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소년의 손이었다.

물론 손도장이 여성의 것이라고 해도 꼭 벽화를 그린 사람이 여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진은 벽화가 그려진 동굴이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나 좁다는 점을 들었다. 동굴에서 남성 화가가 여성 모델의 손도장을 찍기엔 무리였다는 말이다. 게다가 손도장은 4분의 3이 왼손이었다. 인류의 조상 역시 오늘날 우리처럼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즉 여성 화가가 자신의 왼손을 벽에 대고 오른손으로 물감을 칠해 손도장을 찍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

그렇다면 동굴벽화를 그린 여성은 누구였을까. 벽화의 제작 시기는 화가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지난해 6월 15일 세계적인 과학저널인 '사이언스' 표지에 스페인 엘 카스티요 동굴 벽화가 실렸다. 영국 브리스틀대 앨리스테어 파이크 교수는 이날 발표한 논문에서 동굴벽화가 최소한 4만800년 전에 그려졌다는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전까지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는 3만5000년에서 3만년 전 정도에 불과했다.

동굴벽화는 기존의 탄소연대측정법이 통하지 않는다. 목탄 같은 유기물 물감을 쓰면 탄소가 있어 연대를 알 수 있는데, 동굴벽화는 황토 같은 광물성 무기물 물감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파이크 교수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동굴 벽면에 물이 새어들면 얇은 방해석 막이 생긴다. 방해석에는 방사성물질인 우라늄이 들어 있다. 우라늄은 방사선을 방출하고 토륨으로 변하는데, 그 변환 속도는 이미 알고 있다. 즉 벽화 자체는 몰라도 최소한 나중에 덧씌워진 방해석 막의 연대는 알 수 있다.

오늘날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4만2000년에서 4만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 정착했다. 당시 유럽에는 사촌 격인 네안데르탈인이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벽화를 그린 화가는 막 유럽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이거나,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둘 중 하나다. 연구진은 확실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벽화가 만약 방해석 막이 생기기 전 수천년 전에 그린 것이라면 네안데르탈인밖에 없다.

올 초 스페인 코르도바대 연구진은 스페인 남부에서 4만2000년도 더 된 동굴벽화를 찾아냈다. 연구진은 벽화 자체가 아니라 주변의 목탄 물감을 통해 연대를 알아냈다. 실제로 네안데르탈인은 크레용 비슷한 물감으로 몸이나 장신구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결국 인류 최초의 화가는 후손 하나 없이 손도장만 남겨두고 사라진 셈이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애타게 쫓던 소를 찾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