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주간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런(Akron)은 한때 세계 타이어의 수도(首都)였다. 파이어스톤, 굿이어 같은 세계 5대 타이어 메이커가 본사를 그곳에 두었다. 애크런의 타이어는 세계시장을 50년 이상 장악했다. 5개 회사 영업부장들은 금·토요일이면 골프 클럽에서 만나 운동하고 식사했다. "회사 서열은 매겨져 있었지만 모임만은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파이어스톤 영업부장 출신의 증언이다.

그들의 주말 파티는 프랑스 미슐랭이 래디얼 타이어를 개발하면서 막을 내린다. 애크런의 타이어가 2만㎞ 달리면 미슐랭 타이어는 6만4000㎞를 갔다. 애크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럴 리가 있나" 하며 신기술을 믿지 않았다. 이어 "그건 돌로 포장된 길이 많은 유럽에나 맞는 타이어"라고 험담했다.

무너지는 사람들이 먼저 보이는 증상은 현실 부정이다. 신기술은 "그거 진짜냐"며 부인하고 도전자는 "그까짓 게"라고 무시한다. 판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바뀐 것을 믿지 않는다. 웅진, STX, 동양 등 요즘 몰락하고 있는 중견 그룹들도 같은 병을 앓았다.

경제계에서 재벌 그룹의 연쇄 붕괴는 1997년 외환 위기 이래 두 번째 물결이다. 당시 30대 그룹 중 절반이 몰락했다. 그때는 아시아 경제 위기의 파장이 작용했고, 지금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여진(餘震)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16년 전 몇몇 총수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라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 회장님이 정부의 무능력을 탓했다. 일부 총수는 '정권에 밉보여 타살당했다'며 월간지에 나와 억울한 처지를 호소했다.

이번에도 정권을 탓하고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총수들이 나타났다. 정권의 눈 밖에 났다는 것으로 경영 실패의 핑계거리를 내세우는 사례도 있다. 자신의 판단 착오나 무리수 경영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벌 붕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번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어느 그룹의 임원은 자기 회사를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구멍가게죠"라고 했다. 총수가 골목길 가게처럼 모든 일을 시시콜콜 지시하고 제멋대로 경영했다는 말이다. 연간 매출액이 1조원 넘으면서도 임원이든 사원이든 10만원 이상 지출할 때는 회장님 결재를 받아야 하는 곳도 있다.

부동산을 믿는 경영도 서로 닮았다. 부동산 값은 반드시 오른다는 경험 철학에 따라 수천억원을 들여 골프장을 짓고 본사 빌딩을 올린다. 그것도 자기 돈이 아니라 저축은행이나 증권회사에서 빌린 돈으로 사들인다. 그러면서 썩을 대로 썩은 건설회사를 인수해 공사판을 벌인다. 그런 총수일수록 부동산 하락 추세가 10년 이상 지속되는 현실을 부인한다. 재개발 지역 몇 곳이 반짝 오르는 걸 자기 투자 철학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삼고, 그것이 마치 전체 부동산 시장의 용틀임으로 착각하는 병에 걸린 것이다.

무너지는 재벌에서 얼치기 금융 귀재(鬼才)들이 설치는 현상도 공통적이다. 외국 금융회사 경력자라거나 미국 MBA를 받았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총수가 2000억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자율이 얼마나 높든 기업어음(CP)을 남발하는 것으로 고액 연봉에 보답한다. 배운 자들이 내놓은 기기묘묘한 금융 기법 덕분에 탐욕을 채운 총수가 "그놈 재주 참 좋다"고 감탄하는 사이 그룹은 더 위태로운 자금난에 빠져든다. 총수는 감옥에 들어설 즈음에야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실패한 재벌 중에는 구제금융을 주면 잠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곳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은 저만큼 바뀌었건만 총수들은 30년 전 창업 시절이나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던 시절에 그대로 머물러있다. 잔잔한 호수에서 돛단배를 띄우는 항해술(航海術)로는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법칙을 모른다.

인터넷 검색 회사 구글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무인(無人) 자동차 운행을 실험 중이다. 2015년까지 달에서 고화질 동영상을 보내는 기술을 개발한 팀에는 2000만달러(약 216억원)를 주겠다며 우주에 투자했다. 우리 재벌들처럼 건설·골프장·광고대행 등 남들이 다 하는 영역에 뛰어들지 않고 엉뚱해 보이는 곳에서 회사의 미래를 찾고 있다. 애크런도 타이어 산업의 몰락 이후 단열재·방수재 같은 폴리머 사업을 통해 도시가 되살아났다.

문어발 재벌(Octopus)이란 말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미국의 문어발 재벌은 100년 새 대부분 정리됐다. 일본 재벌도 2차 대전 후 강제 해산됐다가 상당수가 부활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부분 해체돼 각자 독자 생존의 길로 흩어졌다. 중견 그룹에서 시작된 재벌 그룹 해체의 흐름은 서서히 더 큰 그룹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