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놈들'은 정말로 쇠말뚝을 박았을까? 오랫동안 필자는 전국의 '쇠말뚝' 현장을 답사하였다. '이여송이 맥을 잘랐다'는 것과 '일본놈들의 쇠말뚝' 이야기가 많았다. 왜 쇠말뚝을 박을까? '산의 파괴는 인간의 비극(山破人悲·산파인비)'이라는 풍수설 때문이다.

'쇠말뚝(鐵�·철익)'이란 말을 맨 처음 꺼낸 이는 조선의 학자군주 정조임금이었다. 사연은 고려 공민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민왕은 기울어져 가는 원나라를 버리고 새로이 개국한 명나라 주원장과 관계를 튼다. 이에 주원장은 1370년(공민왕 19년) 도사 서사호(徐師昊)를 고려에 파견하여 명산대천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고려가 명에 복속된 만큼 천자가 산천에 제사를 지냄에 고려의 산천 또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주원장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만, 천하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 아니었다. 원의 사위국인 고려를 함부로 할 수 없어 주원장은 초기에 고려와 공민왕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제후국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나라를 세운 천자로서 관례였다. 쇠말뚝을 박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도사 파견에 '압승술(壓勝術·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을 누르는 일)'을 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경기도 안양 삼막사에서 발견된 일제 혈침 추정 쇠말뚝 2개'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2009년 12월 10일 사진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385년(우왕 11년)의 일이다. 이때는 공민왕의 피살, 고려와 원의 관계 복원 움직임 등으로 명나라와는 매끄럽지가 못했다. 명나라가 사신 장보(張溥)를 보내 서사호가 세운 비(개경 남쪽 陽陵井·양릉정에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비석이 세워진 뒤 병란, 수재, 한발 등이 잇따르자 고려 조정은 비를 넘어뜨려 버렸다. '압승비(碑)'때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이 소문이 명나라까지 전해지자 장보로 하여금 확인케 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797년 정조 임금은 "서사호가 단천 현덕산에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난 이후 북관(北關)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쇠말뚝 단맥설'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서사호는 맥을 자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지맥을 자른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전주시 금상동에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무덤이 있다. 회안대군은 2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이자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에게 패한 인물이다. 그는 전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묻힌다. 문제는 그 자리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老鼠下田形·노서하전형)'의 길지였다는 점이다. 나중에 이를 안 이방원은 산에 뜸을 놓고 맥을 자르게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회안대군 후손들은 자신들이 '호미 자루를 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믿게 된다. 맥이 잘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길지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호남의 길지로 소문이 나서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땅에 또 쇠말뚝을 박은 이들은 누구일까? 이여송(李如松)과 일본인들이 '주범(主犯)'으로 알려져 있다. 이여송은 누구인가? 조선의 후예로서 명나라의 명문가였다. 아버지 이성량은 명나라를 지켜주는 동북(요동)지방의 최대 군벌이었다. 아들 이여송이 조선에 출병할 때 "조상의 고향이니 구원에 힘쓰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평양으로 후퇴하였다가 그 해 9월에 귀국한다(이상은 '明史·명사'의 기록이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이여송이 1593년 5월 문경까지 내려갔다가 9월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한다(이여송이 직접 출전하지 않고 그 휘하 부대가 문경까지 갔을까?). 확실한 것은 그가 조선에 머문 것은 1년이 채 안 된 짧은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이여송에 대한 조선 조정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조선을 재건시켜 준 '재조조선(再造朝鮮)'의 은인이었다. 심지어 평양에 생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 후손을 챙겼다(이여송은 조선에서 琴·금씨 여인을 취해 후손을 남겼다). 그러한 이여송이 조선의 맥을 잘랐다는 것이다. 서길수(서경대) 교수는 '이여송이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 등에서 40개 이상의 지맥을 자른 것'으로 조사하였다('풍수침략사 연구시론'). 이여송이 밟지 않은 지역들이다.

조선의 후예로 명나라의 요동지방 군벌에 올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 이여송의 초상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있는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 이방간은‘2차 왕자의 난’때 태종 이방원에게 패배한 뒤 유배 생활을 하다 여기에 묻혔다. 이 묏자리 가 길지임을 안 태종은 산에 뜸을 놓아 맥을 자르게 했 다고 한다.

'일본놈들의 쇠말뚝'설은 또한 어떠한가? 곳곳에 그러한 전설이 전해진다. 부분적으로 개연성이 있는 곳도 있다. 그런데 쇠말뚝의 입지나 유형들이 너무 다르다. 일제가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19세기 후반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주변 열강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이 측량이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도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에서 비롯된다. 1895년에는 일본은 200명 이상의 측량사를 보내 전국을 측량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다. 1912년 일제가 삼각측량 실시에 즈음하여 시달한 주의사항 가운데 "삼각점 표석 밑에 마귀를 묻었기 때문에 재액이 닥쳐올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이후 측량사업은 식민지 건설(도로·철도·신도시 등)로 더욱더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입장에서 '마귀를 묻었다'고 오인하였다. 특히 조상 산소 뒷산에 삼각점이 박힐 경우 '쇠말뚝'으로 여겨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둘째, 한·중·일 삼국 모두 산악숭배사상이 지대하여 명산대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냈다. 800만 이상의 신을 상정(想定)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신이 계시고(神の坐す), 신이 강림하고(神が降り立つ), 혼이 소생하는(魂が蘇る) 곳이 바로 산이다. 명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할 때 그 산천에 제사를 모셨듯, 이미 일본 땅이 되어버린 조선의 산천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영산으로 알려진 곳에 그들의 신사를 지어 신성시하였다.

결국, 쇠말뚝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자의 '주인 의식 결여와 피해 의식'의 산물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전국의 영산 정상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육중한 송수신 탑이 무수하다. 더 큰 쇠말뚝이다. 굴착기를 동원하여 산을 평지로 만드는 것은 식전 해장거리도 안 된다. 더 큰 맥 자르기이다. 흐르는 강물을 막고, 산줄기를 무 자르듯 하여 생태계를 교란시킨다. '이여송·일본놈 쇠말뚝'에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정작 이것을 우려하는 이는 드물다. 이 또한 자기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주인 의식의 결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