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퀴한 쉰내가 나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3평 남짓한 단칸방. 침대와 TV, 냉장고, 밥솥이 가재도구의 전부다. 이곳에 혼자 사는 최정석(83)씨는 초기 치매 증세를 보이는 경도인지장해(輕度認知障害) 환자다. 최씨는 주로 TV를 보거나 자면서 시간을 보낸다. 창밖이 어둑해지면 가끔 동네를 걷기도 한다. 온종일 대화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날이 많다.

지난달 7일 오후 1시, 평소대로라면 낮잠을 잘 시간이지만 최씨는 손녀딸 또래의 대학생 오로라(22)·장유진(20)씨와 함께 있었다. 강동구 치매지원센터의 '찾아가는 인지 건강 프로그램'에 치매 서포터스로 참여한 오씨와 장씨는 벌써 두 달째 일주일에 한두 번씩 최씨를 찾아 인지 능력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프로그램은 개구리와 오리 그림을 색칠하는 미술 수업이었다. "할아버지, 오리는 우리 무슨 색으로 칠할까요?" "오리? 오리는 노란색인데…." 최씨가 노란 물감으로 오리를 칠하기 시작했다. 오리를 완성한 최씨 앞에 이번엔 개구리 그림이 놓였다. "할아버지, 이거 뭔지 알겠어요?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건데." "뛰어다녀? 비둘기?" "그거 말고요. 두꺼비랑 비슷한 거요." "아, 그거 그거, 개구리." "와, 맞아요!"

서울 강동구 치매지원센터의 대학생 치매 서포터스 장유진·오로라씨가 독거 노인 최정석씨와 함께 오리와 개구리 그림을 색칠하는 미술 수업을 하고 있다.

서포터스 활동을 총괄하는 강동구 치매지원센터 조승현 작업치료사는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최정석 할아버지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된다"며 "뇌를 자극하고 뇌세포를 깨우는 이런 작업이 경도인지장해가 치매로 이행되는 속도를 그만큼 늦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강동구 치매지원센터가 처음 시작한 독거노인을 위한 대학생 서포터스 프로그램은 지역사회가 치매 환자를 돌보는 선진국의 모범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봉사 활동 참가자들이 치매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직접 치매 예방·치료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있는 시도다. 인터넷으로 모집 공고를 접하고 서포터스 활동에 참여한 대학생 27명은 6시간 사전 교육을 받고 독거노인 20명을 매주 찾는다. 첫 시간에 간단한 인지 능력 테스트를 한 뒤 각자의 치매 증세에 적합한 미술, 음악, 원예, 모자이크, 퍼즐 게임, 찰흙 공작 수업을 한다. 교육 후엔 보고서를 내 치매지원센터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최씨는 "처음엔 어렵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재밌다"고 했다. 치매지원센터의 설문조사에선 프로그램에 참여한 독거노인 중 19명이 '만족'을 표했다. 치매와 거리가 먼 대학생들이 치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큰 성과다.

이화여대 심리학과에 재학 중인 신현경(23)씨는 "할머니께서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하셨다"며 "치매 증세가 있는 노인들이 홀로 방치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신씨는 "오전부터 문밖에 나와 몇 시간을 기다리던 할머니를 잊지 못할 것 같다"고도 했다. 강동구 치매지원센터의 치매 서포터스 프로그램은 9월에 끝난다. 이번 성과를 검토해 추후 프로그램 재개와 확대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