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죽고 싶단 생각을 한 건 일곱 살 때였습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언니와 둘만 남았는데, 그때부터 학교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면서 울고만 있었어요. 그때로 되돌아가 삶을 마치고 싶습니다."

고등학생 누나가 쓴 '희망편지'를 읽은 학생들의 표정은 침통해졌다. 4일 오후 '희망편지 쓰기' 행사가 열린 서울 도봉구 노곡중 교실. 자신의 '희망편지'를 쓰기에 앞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쓴 희망편지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학생의 편지를 읽은 3학년 진민경(15)양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 편지에다 줄줄 풀어냈을까"라며 "진심으로 이 언니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다른 학생은 행사를 진행하는 자원봉사자에게 "이런 것까지 써도 되느냐"며 "왕따를 당하고 있는데 편지에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4일 오후 서울 도봉구 노곡중 학생들이 쓴 ‘희망편지’들(위). 학생들은 편지지에 친구·부모님과의 갈등, 학교 성적 등, 죽음까지 생각해봤을 정도로 힘든 고민을 써내려갔다. 편지를 다 쓴 학생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놔 후련하다”고 말했다.

"예쁜 글씨보단 솔직한 내용이 중요해"라는 자원봉사자의 말에 학생들은 사뭇 진지해졌다. 옆 친구가 볼까 봐 팔이나 머리카락으로 가린 채 편지지를 빼곡히 채워나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아 편지를 써내려가던 A(15)군은 "1학년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면서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했던 답답한 심정을 편지에 써내려가니 후련했다"며 "제 또래 친구들이 이 편지를 읽고 따돌림이 나쁜 거라고 공감하고, 나처럼 따돌림 때문에 힘든 친구에게 힘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봉구 자원봉사센터가 진행하는 '희망편지 쓰기'를 통해, 학생들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편지지에 스스로 털어놓으면서 '힐링(healing)'의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이 쓴 희망편지는 자원봉사자들의 감수를 거쳐 다른 학교 학생들이 쓴 희망편지와 익명으로 교환하게 된다. 학교 폭력 등 또래의 고민을 함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편지 감수 과정에서 자살 충동이나 학교 폭력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된 학생들은 심층상담도 받을 수 있다. 도봉구는 처음 '아이들이 과연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을까' 반신반의했지만 편지에 드러난 학생들의 고민은 예상보다 솔직하고 충격적이었다.

지난 7월 12일 희망편지 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도봉구의 한 여고 학생들은 "자살하려고 손목을 그었지만, 겁이 나서 죽지도 못하고 상처만 남았죠", "집에 가면 방 안에서 나오기도 싫어. 물 보면 뛰어들고 싶고 칼 보면 찌르고 싶고. 나 진짜 어떡하지?"라고 편지에 적었다. 이날 편지를 쓰던 B(17)양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했다. 한참을 교실 밖에서 흐느끼다 교실로 돌아온 B양은 "편지를 쓰다 보니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가 떠올라 눈물이 쏟아졌다"고 털어놓았다. 자리로 돌아와 편지지를 끝까지 빼곡히 채워 내려간 B양은 "다시 왕따가 된다면 이번에는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나 같은 애들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썼다. 그는 "이렇게라도 그때 쌓인 응어리들을 풀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 당시엔 못 했던 말들을 뒤늦게나마 편지지에 털어놓으면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봉구청 자치행정과 황경섭(51) 팀장은 "그동안 아이들이 이런 고민을 가슴 속에 담고만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며 "학생들이 마음속 깊은 얘기까지 끌어낸 솔직한 편지를 쓰면서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았던 자원봉사자 설선희(55)씨는 "외국에서 받은 치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신에게 편지 쓰기'였다"면서 "어린 나이에 죽음까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마음의 상처를 털어버리고 치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