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록 정치부 부장대우

며칠 사이에 '보도연맹'과 관련된 두 뉴스를 접했다. 보도연맹은 6·25전쟁 와중에 좌익 경력자와 양민이 구분되지 않고 대규모로 살상된 사건 정도로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건이다.

첫 소식은 이 사건이 장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구자환이라는 영화감독이 9년 동안의 취재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8월 29일 경남 창원에서 시사회를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제목은 '레드툼'. '빨갱이 무덤'이라는 의미의 살벌한 제목이었다. 하지만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면 당시 죽음을 당한 1만7000여명(2006년 의문사진상조사위)의 원혼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지난 6월 27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장편 독립영화 현물 지원 사업' 지원 대상으로 결정된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8월 30일 통진당 이석기 의원 입에서 '보도연맹 사건'이 나왔다. 이날은 통진당 경기도당 사람들이 지난 5월 12일 서울 마포구 한 종교 시설에 모여 나눈 '전쟁 준비' 관련 녹취록이 만천하에 공개된 날이었다.

기자는 녹취록 내용을 읽고서도 이석기 의원이 말한 '전쟁 준비'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30일 저녁 이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방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얘기한 내용을 읽어보고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이 의원은 회견에서 "(5월 12일) 강연에 모인 사람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진보당 열성 당원들이었다"며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보도연맹 사건을 보라. 무고한 사람이 무려 20만명 학살당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아, 그렇구나 싶었다. 자신을 포함, 그 자리에 모인 130여명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 인민군이 아닌 한국 군·경으로부터 가장 먼저 살상 대상이 될 것이니 '정치·군사적으로' '기술적으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 생각이 평택·혜화동·동두천 등지의 주요 기간 시설 테러라는 발상으로 이어지고, 이를 위해 부산에 가서 총을 입수하고 전문가를 찾아 폭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들이 회합을 가진 5월은 한반도 안보 상황이 악화된 시기이기는 했다. 5월 초 미 핵 항모 니미츠가 부산항에 들어왔고, 그에 앞서 4월엔 미 NBC의 '전쟁 전문 기자'라는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 인터넷이 들끓기도 했다. 이석기 의원과 130여명은 이런 시기에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석기 의원은 모인 130명을 '남녘 혁명가'라 했고, 미국을 '적'이라 했다. 그의 결론은 "오는 전쟁 맞받아치자"였다.

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논외(論外)다. 제주를 찾는 중국 관광객이 200만명에 육박하는 시대에 보도연맹 시절에서 헤매고 있는 그들을 보며 어처구니없어하는 것이 상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망상가 한두 명이 사회의 근간을 허물 수 있는 게 현대사회다. '대(對)테러'는 현대 국가의 주요 존재 목적 중 하나다.

그들은 망상에 젖은 테러리스트 한두 명과도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지난 5월 정도의 상황에서 전쟁 발발을 예감했다. 전쟁이 나면 자기들이 한국 군·경에게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결사 항전을 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들을 했다.

이석기 의원은 5월 12일 이런 말을 했다. "최종 결전의 결사를 하는 거다. 이 또한 영예롭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선 국가 핵심 질서를 향한 테러 냄새가 난다. 이 정도 되면 장난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