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주간

"우물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파 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한다." 중국인의 의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덩샤오핑이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자주 썼던 표현이다. 중국 경제의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을 오래 간직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덩샤오핑이 1978년 10월 오사카의 파나소닉 공장을 시찰할 때도 똑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 공장을 시찰한 뒤 "근대화란 무엇인지 (여기서) 알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2개월 후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공식 선언했다. 파나소닉도 곧 베이징에 컬러TV 브라운관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그 후 일본과 중국의 경제협력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중국의 첫 민주화 운동인 천안문 사태가 터지자 서방 언론들은 공장을 계속 가동하고 있던 파나소닉을 비판했다. 하지만 파나소닉은 따가운 비난을 한쪽 귀로 흘리며 '중국은 사업하기 좋은 곳'이라고 대변하듯 조업을 끊지 않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파나소닉 오사카 공장을 방문한 지 34년이 흐른 작년 가을, 중국 내 파나소닉 공장들이 반일(反日) 데모대의 공격을 받아 망가졌다. 댜오위다오 영토를 놓고 두 나라가 정면 충돌하자 '우물 파 준 은인(恩人)'에게 행패를 부린 꼴이다.

중국 경제는 너무 먼 길을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은혜나 의리를 팽개치고도 미안해하지 않을 만큼 중국의 많은 것이 변했다. 개혁·개방 정책도 큰 고비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누구나 중국의 위기를 말한다. 5년 전 미국처럼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독감을 앓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다.

중국 어느 도시를 봐도 버블 경기가 무너지는 초기 증상이 뚜렷하다. '귀성(鬼城)'이라고 부르는 유령 타운이 여럿 등장했다. 부동산 경기가 극도로 나쁘다는 증거다. 금융회사들이 고금리 재테크 상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해 부동산 리조트 사업이나 인프라 시설에 투자했던 것들이 부실화됐다. 우리나라 저축은행들이 너도나도 프로젝트 파이낸스(PF)에 투자했다가 거덜났던 것을 연상시킨다.

버블과 그 버블의 붕괴를 미리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수백 년 자본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어떤 강한 권력도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버블을 조장하는 세력은 권력의 핵(核)과 가까운 곳에서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이지 밑바닥 서민들은 아니었다. 중국의 버블도 돈 있고 권력 있는 계층이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시진핑·리커창 지도부가 한 식구로 지내던 세력을 상대로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르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부동산·금융 버블로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들 역사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이것만이 아니다. 버블이 붕괴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유능한 정부도 정책 실패를 반복한다. 정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5년 전 미국의 재무부 장관도 리먼 도산 이후 곪은 상처가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로 부풀어가는 것을 보며 "신이여, 나라를 구해주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고 고백했다. 미국·유럽 국가들은 과거 일본이 버블 붕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비웃었지만 그들도 이번 금융위기에서 일본과 똑같은 실패를 거듭했다. 모든 나라가 거쳐 간 코스를 중국의 정책 당국자들이 비켜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국은 지금 30년 이상 누적된 개혁·개방 정책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불거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혹 이번 위기를 뛰어넘는다 해도 다음엔 민주화 열풍이 기다리고 있다. 빈부격차나 노동쟁의 양상을 보면 일당 독재체제는 머지않아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다. 온 나라가 민주화 몸살을 앓을 경우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는 한국인들이 지난 25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일본은 1960~70년대 민주화와 경제 개방을 통해 선진국으로 진입했으나 마지막 단계인 금융·외환 시장 개방에는 성공하지 못해 20년 침체를 겪고 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高)의 파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경제가 혼돈에 빠진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라를 개방하면서 민주화를 진행했으나 한국은 두 차례 외환위기를 맛보았다. 일본·한국·대만 모두가 미완성(未完成) 제품이다.

어느 나라건 민주화나 국가 개방이 어정쩡한 상태로는 선진국 명찰을 달 수 없다. 아시아 선발(先發) 국가들이 걸어온 길로 중국이 이제 막 들어서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 선발국들과는 다른 길을 개척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 못 할 것이다. 앞으로 몇 년은 중국과 같은 병을 앓으며 중국에서 밀려올 거친 파도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