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70년 넘게 살면서 친구들한테도 아버지 자랑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우리 아버지가 독립투사'라고 자랑하고 싶기도 했지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죠."

지난 12일 서울 중구 을지로4가 중부시장 한편에 있는 '단군식당'에서 만난 김성식(77) 할아버지는 자신의 앞에 놓인 태극기와 부채를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자신의 보물 1호라는 태극기와 부채를 보며 '우리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독립투사'라고 마음속으로 자랑했다고 한다. 태극기와 부채는 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썼던 것들이다. 80년이 넘은 태극기와 부채는 색이 누렇게 바래다 못해 갈색으로 변색했지만,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이었다. '조국혼(祖國魂) 심(心) 경세종(驚世鍾)' 이라고 쓰인 부채는 '조국 혼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놀라게 하라'는 의미로 백범 김구 선생이 직접 휘호를 써서 전한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고(故) 김정로 선생의 아들 김성식(77)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중구의 백반집에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썼던 태극기와 부채를 보여주며 “내 보물 1호”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고(故) 김정로 선생이다. 김정로 선생은 김구 선생이 '철혈남아'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독립투사다. 그는 광주고보 1학년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상해·용정 일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또한 전라북도 전주 건지산(현 전북대 캠퍼스)에 건지사라는 절을 세워 전북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건지사 한쪽에 태극기와 고종 황제 위패, 친필 서한을 모셔놓고 대한민국 독립을 항상 기원했다고 한다. 김정로 선생은 1943년 일제에 붙잡혀 해방될 때까지 전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 할아버지는 "일곱 살이 되던 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주교도소로 가서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때까지 아버지가 독립투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할머니께 물어보면 항상 "아버지는 먼 데서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처음 만나는 아버지는 수의를 입고 얼굴에는 복면이 씌워진 채 나왔다"며 "처음엔 아버지가 왜 저런 곳에 저렇게 계실까 생각을 했지만, 독립투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김정로 선생은 해방 직후 석방돼 김구 선생을 모셨고, 제2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하지만 심장마비로 45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남기신 것은 태극기와 부채밖에 없었다"며 "집 안에 먹을 것 하나도 없어서 홍제동, 을지로 일대를 오가며 돈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1976년부터 을지로4가 중부시장에 가정식 백반집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식당을 하지만 아버지의 유훈은 절대 잊지 않고 산다"고 말했다. 아버지 김정로 선생은 아들에게 "내 이름 팔아서 잘되려고 하지 말고, 나보다 더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강조했다. 김 할아버지는 1984년부터 13년 동안 신호가 없어 위험한 을지로4가 방산시장과 중부시장 사이 건널목에서 깃대를 들고 인간 신호등 봉사를 했다. 그 일대를 지나던 정부 고위 관료가 그 모습을 보고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정로 선생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생전 "독립운동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어디서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훈육한 때문이다. 아들인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보훈처에 독립운동가 신청도 하지 않았다. 김 할아버지는 "지금의 나라가 있는 것은 아버지처럼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 때문"이라며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봉사하는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