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KBS배(盃) 쟁탈 전국노래자랑'은 토요일 저녁마다 사람들을 흑백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처음 등장한 TV 가요 경연 대회여서 인기가 대단했다. 71년 1회 대회 연말 결선은 40년 넘도록 기억에 생생하다. 우승자는 열여덟 살 김명희였다. 통기타를 치며 가늘게 떨리는 비브라토로 '세노야 세노야'를 불렀다. 지금 중견 재즈 가수 윤희정이다. 까까머리를 털모자로 가린 고교생 전영록은 '듀오'라는 그룹으로 나와 장려상을 탔다.

▶이 프로그램은 70년대 말 없어졌다가 80년 '전국노래자랑'으로 살아났다. 가수 발굴 역할을 접고 동네 장기 자랑으로 성격을 바꿨다. 77년 MBC가 시작한 '대학가요제'에 밀린 탓이다. 그 무렵 대학가는 록밴드 열기가 뜨거웠다. 서울대만 해도 스물 넘는 밴드가 해마다 모여 솜씨를 겨뤘다. 대학가요제는 청년 문화를 창작곡 경연에 끌어들여 유신 시대 숨 막히던 젊음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초기 대학가요제는 가수 이수만이 사회를 봤다. 서울 농대 밴드 '샌드페블즈' 출신 이수만은 지금 대중음악계 실력자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다. 1회 대상(大賞)은 이수만 4년 후배 '샌드페블즈'가 '나 어떡해'로 따냈다. 이 그룹 1년 선배 김창훈이 작사·작곡했다. 형 김창완과 함께 '산울림'을 만든 그 김창훈이다. 부산대 중창단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가 우승한 2회 대회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2회 준우승 금상을 받은 여학생은 '돌고 돌아가는 길'을 부른 단국대 노사연이었다. 은상은 배철수가 이끄는 항공대 밴드 '활주로'의 '탈춤'에 돌아갔다. 스타는 단연 명지대 심민경이었다. 청바지·티셔츠 대신 칼라를 단정히 채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노래도 경쾌한 록이나 포크가 아니라 트로트였다. 심민경은 피아노를 치며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구성지게 불렀다. 곧바로 가수 심수봉으로 데뷔했고 '그때 그 사람'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휩쓸었다.

▶스타와 히트곡을 숱하게 배출했던 대학가요제가 폐지됐다. MBC는 "제작비는 많이 들고 시청률은 너무 낮다. 대중과 호흡하지 못하는 '허공의 메아리'였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스타 키우기는 기획사 몫이 됐다. 가수 등용문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옮아갔다. 작년 대학가요제 상금은 500만원, 오디션 상금은 5억원에 이른다. 모든 분야에서 벽이 사라지는 시대에 대학생이라는 울타리를 치는 것도 낡았다. 70~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세대는 또 하나 추억거리를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