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한강교는 6월28일 우리 육군 공병대가 폭파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강교가 부서졌다. 이 폭파로 많게는 800명, 적게는 2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서울 방어에 참가했던 아군(당시 3개 사단이 참여했다)의 퇴로가 끊겼고 피란민(당시 서울시민은 140만명이었다) 역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8월 28일, 한강교 폭파를 직접 책임졌던 최창식(崔昌植) 공병감을 전격 구속, 9월 16일 최 공병감을 총살했다. 죄목은 적전비행(敵前非行). 최 공병감은 한강교 폭파로 인한 책임을 지게 된 셈인데, 이 군법회의의 판결은 폭파를 직접 명령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이 전사한 뒤였다.

이 판결은 그러나 1961년 9월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玉貞愛)씨에 의해 재심이 청구되고 이를 접수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이듬해 5월 15일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했고, 1964년 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최 공병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황준환 대령(재판장)은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최창식 공병감으로부터 폭파 준비 명령을 받고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에 폭탄을 설치한 공병장교들은 공병학교장 엄홍섭(嚴鴻燮) 중령과 김재식(金在植) 대위, 황원회(黃元會) 중위, 이창복(李昌馥) 중위, 임흥순(任興淳) 중위 등이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 살고 있는 이창복(육사8기) 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강교 폭파는 황원회 중위, 한강철교는 저와 김재식 대위, 제1공병단 임흥순 중위가 맡았다”고 회고했다.

“한강교와 한강철교 3곳을 포함해 4개 교량에 폭약을 설치했는데 폭약량 계산을 제가 했었어요. 6월 26일 저녁에 공병감실에 불려 가 폭약 정찰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 보니, 한강에 다리가 4개더군요. 한강교 남쪽 파출소에 방공호가 있어 그것을 이용했어요. 다시 공병감실로 돌아가 폭약량을 계산하고 폭약 신청을 한 뒤 김포 공병학교로 돌아갔다가 남산에 야전텐트를 치고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폭약을 수령하고 한강교에 400파운드 정도의 폭약을 설치했으나 불발에 대비, 넉넉하게 900파운드를 썼어요. 하지만 27일 당시 전세가 호전돼 장착한 폭약을 거둬들이라는 명령을 받지는 못했어요. 전방 상황이 좋으면 차량이 미아리 쪽으로 향했고 상황이 나빠지면 한강 이남으로 향했어요.

(28일 새벽 2시경) 칠흑 같은 밤이었고 비가 내렸어요. 폭파 당시 교량 양측에 1개 분대 정도의 공병대를 배치, 인마(人馬)와 차량의 통행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당시 동원된 병력이 부족해 공포까지 쏘았으나 저지하기 어려웠어요.”

그는 “한강(인도)교는 도폭색(導爆索)을 쓰지 않고 전기식으로 장약(裝藥), 성공했으나 철교는 도폭색이 오래돼 연소가 안 됐다”며 “철교 하나는 실패했고 하나는 반파(半破)됐다”고 했다. 도폭색은 와이어에 폭약을 주렁주렁 매단 폭탄을 말한다.

“한강교 시설 중에 상수도관과 통신선로가 있었는데 다리가 전파되고 상수도관이 터져 물이 콸콸 쏟아졌고, 통신선로에 불이 붙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그날 새벽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도 없었어요.”

이 장군은 1964년 야전군 공병부 차장으로 복무할 당시 최창식 공병감 재심 판결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전쟁 중에 대구로 정부가 내려가 국회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다. 저는 증인으로 재판정에 서서 ‘최 대령은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강교를 지날 때 채병덕 참모총장이 차장에게 ‘나 아니면, 공병감이 명령하기 전에 다리를 끊지 마라’고 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폭파 당시 한강철교 쪽에 있어서 (인도교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나 상황이 불리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남산 쪽으로 탱크로 추정되는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어요. 저는 적이 침입했다고 직감했지요.”

그는 조기 폭파 논란에 대해 “아쉬움이 있으나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며 “(한강교 폭파 이후) 최 공병감은 고민이 많았다. 제게 ‘전쟁이 끝나면 백성에게 사죄하고 옷을 벗겠다’고 말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박사는 “한강교 폭파는 폭파 당시 인명 및 장비 피해가 있었지만, 미군이 참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한강교 폭파는 한강 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하게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6월 29일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이 이뤄졌으며 뒤이어 7월 1일 미 지상군 참전이 가능했던 것이죠. 미군 참전으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이어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해 결국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됐습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7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