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준 사회부 기자(前 칠레 단기특파원)

'아줌마 대통령’을 상상해 본 적 있으신지요? 대통령이 TV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회자들과 아침을 먹으면서 수다를 떱니다. 날씨가 어떻느니, 이렇게 맛있는 김치는 어떻게 담글 수 있느냐는 등등의 얘기를 합니다. 육아 문제로 수다도 떱니다. 그러면서 “당연하죠. 모든 엄마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을 동네마다 만들겠어요. 그것도 당장 말이죠”라며 자연스레 정책을 홍보합니다.

사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이나 메르켈 독일 총리 같은 유명 여성 정치인들에게서는 주로 ‘강인함’이 느껴지지 ‘아줌마스러움’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항상 흐트러지지 않고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모습이 돋보입니다.

이런 상식을 깨고 아줌마스러운 소탈함으로 사랑받은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 아줌마는 올해 대권 재도전을 선언했고 이변이 없으면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미첼 바첼레트(Bachellet) 전(前) 칠레 대통령입니다.

재선에 도전하는 ‘아줌마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Bachellet) 전(前) 칠레 대통령

2010년 퇴임한 바첼레트는 최근 중도좌파연합인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의 후보로 올 11월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1974~90년)을 경험한 칠레는 독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대통령(임기 4년)을 연임(連任)할 수는 없지만 중임(重任)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4년간 정치일선을 떠나면 인기가 떨어지기 십상인데, 현지 언론들은 바첼레트의 무난한 재선을 예상합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의 예상득표율은 43%로 한 자릿수에 머문 다른 후보들을 압도합니다.

그녀에겐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2009년 11월 제가 칠레에 단기 특파원 프로그램으로 갔을 때, 대통령 인터뷰를 위해 수도(首都) 산티아고 도심에 있는 모네다(Moneda) 대통령 궁을 찾았습니다. 과거 동전 주조 공장을 개조했다는 대통령궁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건물보다 약간 컸습니다.

인터뷰 시작 15분 전에 도착해 두리번 거리고 있자, 경호원이 다가와 “한국 기자죠? 저 복도 끝 계단으로 올라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올라갔더니 응접실, 즉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이었습니다.

조금 뒤엔 서류뭉치를 잔뜩 들고 키가 150㎝가 조금 넘을 듯한 통통한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비서인가?”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미첼 바첼레트입니다. 반가워요”라고 말하더군요.

인터뷰 도중 각종 수치를 물을 때도 직접 자신이 서류뭉치를 뒤적이면서 말했습니다. 한 명의 비서나 수석도 배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정치를 하면서도 세 아이의 아침을 직접 챙겨주었습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는 너무 바빠 평일에는 못차려주고 주말에는 꼭 아이들의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그녀는 “바이~”라고 말한 뒤 들고온 서류뭉치들을 두 손 가득히 직접 챙겨 집무실로 들어가더군요.

젊었을 때는 골수 공산당원이었다가 20년간 반(反)독재 운동을 하고 중남미에서 최초로 여성국방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 치고는 너무 ‘옆집 아줌마’같았습니다. 올 2월 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됐을 때도 바첼레트는 혼자 여행가방을 끌고 왔습니다. 바첼레트는 유엔여성기구 초대 총재로서 유엔에서 반기문 사무총장 다음 수준인 사무차장급 인물이었습니다.

지지율 84%, 우파도 사랑한 ‘좌파 아줌마’

바첼레트는 2010년 퇴임 직전 여론조사에서 84%의 지지율을 기록할 만큼 칠레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대통령이었습니다. 퇴임 열흘 전쯤 진도 8.8의 강진(强震)이 일어났는데도 여론은 흔들리지 않더군요. 대지진 직후 칠레 정부는 상황이 경미하다고 오판해 외부의 지원을 거절하고, 복구가 늦어지는 등 실수를 거듭했습니다. 발생후 열흘 동안은 사망자 수 집계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부는 비판해도 바첼레트를 비판하지는 않더군요. 저는 그녀가 대지진 직후 보인 ‘어머니같은’ 행동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첼레트는 지진 발생 한 시간만에 TV에 출연해 지진발생 사실과 정부의 대응을 설명한 뒤 곧바로 피해 현장 6곳을 잇달아 방문했습니다. 세부 대책은 참모들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뛰어들어 피해자들을 다독였습니다. 피해 복구 중에는 주부들이 보는 TV 아침프로그램에 나가 진행자들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정부 대책을 직접 설명했습니다.

퇴임 하루 전날 방송된 TV프로그램에서는 “나의 어머니 집도 물과 전기가 며칠 전에야 들어왔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진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이지만, 일반 서민들처럼 지진이후 열흘 넘게 단전과 단수에 고통을 받았던 거죠. 이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손자 자랑도 했고, 어머니와의 관계 등을 얘기하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젊은 시절 좋아했다는 비틀스의 노래도 직접 불렀습니다.

영어, 독일어 등 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소아과 의사출신의 엘리트이지만, 그에게선 엘리트의 도도함을 찾기 힘듭니다. 춤을 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춤도 추고, 노래를 해야하는 자리에선 노래를 합니다.

혹자는 ‘지지율 84%는 감성적인 중남미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첼레트의 뒤를 이은 우파성향의 피녜라 대통령의 현재 지지율은 35~40%를 맴돕니다. 바첼레트의 초기 지지율은 53% 정도였고 한때 35%까지 떨어졌습니다. 칠레는 독일계 이민자가 많아 유권자들의 취향이 유럽과 가장 닮은 까탈스러운 나라입니다.

80%가 넘는 바첼레트의 지지율은 약 3분의2에 달하는 우파 유권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념이 달라도 “바첼레트라면 지지해주겠다”는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vs. “경제만 생각하는 넌 더 바보야!”

좌파인 바첼레트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 우파인 피녜라 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좌파의 집권이 20년에 달하면서 칠레도 “바꿔!” 열풍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경제 대통령’을 내세운 피녜라의 선거전략도 적중했습니다.

실제로 피녜라 대통령은 공약대로 경제회생에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칠레 경제는 2010~12년 평균 5.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지난해 실업률은 최근 6년 새 가장 낮은 5%였습니다. 인플레율은 3%에 그쳤고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액은 브라질과 멕시코에 이어 중남미 3위를 차지했죠.

그런데도 그는 인기가 없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시위와 집권당에 마땅한 차기 후보가 없는 것 등을 이유로 꼽습니다. 제 생각엔 다른 면도 있어 보입니다. 2010년 피녜라 대통령이 당선된 뒤 다시 모네다 궁을 가니 갑자기 검문검색이 강화됐더군요. 우파는 통제부터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그때 “아, 이 사람 인기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반면 바첼레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안간힘을 쏟았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막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당시에도 그 정도면 중남미에선 훌륭한 성적표였죠. 그녀는 대신 보육 분야에 집중했습니다. 소아과 의사이자 아이 셋을 키운 엄마인 그녀는 “아이는 국가가 키우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재임기간 중 3500여개의 유아원을 지었습니다.

미혼모가 많은 여자 고등학교 안에도 보육시설을 지을 정도였습니다. 이 보육사업의 성공은 그녀에게 상당한 지지율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녀에겐 단점도 많습니다. 그녀의 첫 재임기간 동안에는 보육정책이나 복지정책을 빼고 실제 칠레가 새롭게 먹고 살 거리를 찾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는 부족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공공부문의 임금을 지나치게 올려 사회 전체적으로 임금을 올려달라는 요구가 봇물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재선거에 나서면서는 극좌파인 공산당과 손을 잡았고 “무상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공약을 했습니다. 칠레도 한국과 똑같은 무상(無償) 논쟁에 휩싸여 있지요.

그러나 그녀가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본질’은 불변입니다. 최근 유튜브에 뜬 한 영상을 보니 그녀는 안보(安保)에 대해 “(경제가 나빠지면서)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테러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며 “물과 전기 식량 등을 공급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안보”라고 말하더군요.

만약에 그녀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하는 기사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박근혜 대통령도 좀더 아줌마스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TV에 나와 기뻐서 춤추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은 없지만 남자들 흉보는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김치를 담궈서 청와대 인근 통인동 아주머니들과 나눠먹고, 동네 반상회에 참석해 귤을 까먹는 모습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박 대통령이 조금만 더 따뜻한 이미지가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지 않을까요. 바첼레트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