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異常) 폭설이 내리던 지난 4월 초, 박학기(50)는 거실에서 쏟아지는 눈을 보며 멜로디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전화벨이 울렸고, 통화를 하고 나니 방금 흥얼거린 멜로디가 까맣게 생각나지 않았다. '꽤 괜찮은 멜로디였는데…' 하고 입맛을 다시는데 딸 정연(16·분당 늘푸른고 1)이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가왔다. "아빠, 이거 찾는 거예요?" 딸은 아빠도 모르게 녹음을 하고 있었다. 박학기 신곡 '온종일 비가 내려'는 이렇게 태어났다. 눈을 보며 쓴 곡이지만 계절에 맞게 가사를 비로 바꿨다. 그 딸이 5년 전 박학기 노래 '비타민'을 함께 불렀던 당시 11세 꼬마다.
새 노래 2곡을 포함해 5곡이 실린 박학기의 새 음반 '서정'에는 큰딸 승연(20·동국대 조소과 2)이 한 곡을 불렀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1988년 옴니버스 명반 '우리 노래 전시회' 3집에 실렸고 이듬해 박학기 1집에도 수록된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를 스스로 편곡하고 불러 녹음한 것이다. 피아노 위주로 미니멀하게 편곡된 이 노래에서 승연은 원곡과 다른 셋잇단음표를 쓸 뿐, 일절 기교 없이 맑고 순수한 창법을 들려준다. 특히 2절이 원곡 멜로디와는 파격적으로 다르게 전개될 때,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박학기의 코러스에서는 딸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눈빛이 보이는 듯하다.
"저도 모르게 승연이가 녹음을 해왔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음반에 실으라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아마추어의 노래가 주는 신선함이 있다는 거죠."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두 딸과 함께 만난 박학기가 말했다.
"요즘 주 1회씩 음악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빠 데뷔곡을 다시 편곡해 불러보고 싶어서 녹음했어요. 엄마한테 먼저 들려 드렸는데, '아빠보다 낫다'며 칭찬해 주셨어요."(승연)
박학기와 두 딸은 서로 좋은 음악을 추천해주는 사이이다. 승연이는 아빠가 차 안에서 듣던 밥 말리의 '노 우먼 노 크라이'를 좋아하게 됐고, 정연이는 카펜터스의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를 흥얼거린다. 박학기는 두 딸 덕분에 어반자카파, 넬, 자이언티 같은 국내 뮤지션들을 알게 됐다. 두 딸 모두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많이 받지만, '우선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데 아빠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아직은 취미로 음악을 배워보라고 하고 있어요.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 작곡을 더 잘할 수 있겠지만, 음악은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느낌이 있는 노래를 하려면 인문학 공부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박학기는 "승연이는 미술을 전공한 아빠를 이어 미대에 다니고, 정연이도 인문대로 진학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오는 24일 발매될 박학기 새 음반엔 신곡 '아직 내 가슴속엔 니가 살아'와 '온종일 비가 내려'가 실렸다. 요즘 핑거스타일 기타의 매력에 빠진 그는 2002년 발표곡 '옐로 피쉬'도 핑거스타일로 다시 연주했다. 그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내 노래를 찾아 듣는 걸 보면서 꾸준히 '박학기 음악'을 해 온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