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1972년 최초의 남북 당국 간 접촉이 있은 이래 북한이 40여년간 써먹어 온 대남 전략 패턴을 이번에는 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다시 가동하고 있는 것 같다. 도발로 위기를 조성하고 그 해소책으로 접촉 내지 회담을 연 뒤 원조 등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무슨 꼬투리를 잡거나 사단(事端)을 내 상황을 결렬시키고 대결 모드로 되돌아가는, 반복된 패턴 면에서 보면 분명 그렇다. 이번만은 그런 패턴의 일환이 아니고 좀 더 진정성을 지닌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동안 북한 '신참 영도자'의 미숙성과 지그재그 액션, 그리고 북한 내부 사정, 특히 군부 동향 등으로 미루어 아직은 긴장을 늦출 계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번 타이밍과 저간의 과정을 볼 때 이번 회담 제의는 북한으로서는 해볼 만한 수순이다. 29세의 나이로 한 나라를 세습한 김정은으로서는 선대(先代)로부터 권력을 장악해온 60대 이상의 노회한 정치꾼들, 특히 아버지의 '선군정치' 유산을 효율적으로 승계하기 위해서도 대남 강경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취약한 리더십에는 강경이 가장 쉬운 안전판이라는 것은 역사가 입증해온 것이다. 그간 천안함·연평도 도발, 3차 핵실험, 미사일 시험 등은 권력 기반의 정지(整地) 내지 유지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강경책들은 값비싼 대가를 동반했다. 유엔 제재, 중국의 이완, 그리고 심각한 식량난과 재정 궁핍, 이에 따른 인민들의 고통과 탈북 등은 김정은과 그 집단으로 하여금 더 이상 '강경'에만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대화 제의→긴장 완화→원조'라는 옛 패턴으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이번 대화로 세계와 한국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 뒤 얻을 것을 얻고는 다시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의 끈을 조이는 은둔 모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있다. 다시 말해 그동안 북한 정권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써먹었던 온 앤드 오프(on and off) 또는 냉·온 전략이 이번에도 성공할 것인지가 관심사다. 하긴 회담 대표 가지고 억지 부리는 북한 태도를 보니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북한이 이번에는 그 전략에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관건은 북한의 핵(核)이다. 이제 북핵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어젠다가 돼버렸다. 한국은 물론 미·중 및 주변국과 세계의 관심은 북한 핵과 북한 주민의 인권에 쏠려 있다. 오바마와 시진핑은 지난 주말 캘리포니아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북핵 불용인을 천명했다. 북한이 핵 문제를 피해 가기는 아주 어렵게 됐다. 북한이 핵에 집착하는 한, 세계와 화해하기는 어렵고, 박근혜 정부 역시 핵 문제를 피해 가며 '신뢰 프로세스'에만 초점을 맞추기에는 국내외 여론이 심상치 않다. 여기에 박 대통령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북한이 모처럼 내민 손, 어찌 보면 박 대통령이 은근히 학수고대했던 북한의 손을 덥석 잡자니 세계와의 공조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국민적 여망이 걸리고, 북한 손을 밀치자니 좌파와의 타협점인 점진적 접근, 북한 동포 지원, 잠정적 평화, 신뢰 프로세스 같은 문제들이 아쉬울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분명히 원칙을 정하고(또는 방향을 정하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 핵 문제는 북한도 입장이 있으니 뒤로 미루고 우선 핵 이외의 문제를 풀어가자는 점진론에 기울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핵의 해결 없이는 어떤 것도 진척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의 40년 '먹튀' 전략에 또 하나 조연을 연출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대화를 위한 대화, 무력 도발을 예방하기 위한 저자세 대화는 그동안 해볼 만큼 했다. 역대 대통령은 적극이냐 소극이냐의 차이는 있었어도 모두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적 소망과 북한 인민의 고통 해소라는 명분 아래 불가피하게 또는 기회주의적으로 북한 대남 전략에 들러리를 섰었다. 이제 박근혜 정부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더욱 난망한 것은 북핵이라는 엄청난 암초가 더 얹혀있다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좋은 여건도 있다. 북한의 영원한 동맹일 것 같았던 중국이 북한의 핵과 호전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것은 모처럼 좋은 기회다. 그것은 '신뢰 프로세스'와 더불어 북한을 설복할 중요한 무기일 수도, 유인책일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임기 동안에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의 해체가 북한과 한반도와 그리고 민족 전체에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설득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통일 대통령 못지않게 한반도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개성공단을 다시 가동하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며 이산가족을 상봉시키는 일에 자족한다면 그는 역대를 뛰어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