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린 결론은 '하느님이 한번 나를 부르셨으면 끝까지 가는 거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해병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로만칼라의 사제복을 입은 예수회 소속 신부가 '해병 정신'을 설파하니 느낌이 묘했다.

얼마 전 서강대 이사장에 취임한 김정택(66) 신부는 커버스토리에 자신의 사진이 나온 해병대 주간신문까지 보여줬다. 군대 얘기를 할 연세는 벌써 지났을 텐데.

"곡괭이 자루로 열다섯 대를 맞고 엉덩이가 아파 제대로 대변도 못 봤어요. 귀에 동상(凍傷)이 걸리기도 했고, 진짜 고생은 못 씻어서 옴 걸렸을 때였어요. 약은 없고. 의무병이 '얼음을 깨고 냉수 목욕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한 달 반을 그렇게 했어요."

아담한 체구에 말씨는 잔잔하지만, 그는 해병대 사병 출신에 교수 신부로서 30년, '성격유형검사(MBTI)' 한국판을 만들었고, '리지 등반(맨손으로 좁고 날카로운 바위 능선을 오름)'을 하며, 매년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닌다. 이런 경력 중 그가 단연 내세우는 게 '해병대'다.

"해병대에 안 갔으면 사제가 못 됐을지 몰라요. 신학생 시절 '이렇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 하며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렇게 해서 해병대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제대 날짜가 가까워지자 다시 진로 고민이 시작됐어요. 그때 해병 정신으로 한번 정한 사제의 길을 끝까지 가야겠다고 결심한 거죠."

김정택 서강대 이사장은“결국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랑이며, 이웃 사랑이 하느님의 가치다”라고 말했다.

―신학생 시절 왜 흔들렸습니까?

"광주의 대건신학교에 다닐 때 인근 대학생들과 봉사 활동 동아리를 했어요. 여학생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어요. 결혼하지 않는 삶이 맞는 걸까. 그러던 시기에 영장이 나왔어요. 군대 영장을 받고 그렇게 기뻐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있었나요?

"신학생의 옷을 벗고서 저 자신을 한번 돌아볼 기회라고 여겼지요. 육군 영장을 받고서 해병대를 지원했어요. 그전에 한 군종(軍宗) 신부님으로부터 '군대는 좀 독한데 가서 졸병 생활을 해봐야 인간이 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의 복무 기간 중, 베트남전에서 사이공이 함락돼(1975년) 해병 청룡부대가 한꺼번에 철수했다. 해병대사령부는 예산이 부족해 병사들의 제대를 몇 달씩 앞당겼다. 그는 이듬해 초 제대 휴가를 한 달간 받고 나왔다. 그때 예수회에 입회했다.

"예수회는 일 년에 한 번 입회 지원서를 받는데 바로 그 시기였어요. 휴가 중에 실행에 옮긴 것은 미적거리다가 또 어떤 유혹을 받을지 겁이 났기 때문이죠. 본당 신부가 되는 신학교 졸업은 포기했어요. 예수회 신부가 돼서 공부를 더 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쪽이 제게 맞는 것 같았으니까요."

군복은 수련원에 걸어두고 사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휴가 기간이 끝나자 탈영병 신분이 됐다.

"제가 근무하던 여단(旅團)의 법무 참모에게 '이는 내 삶에 너무나도 중요한 결정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법무 참모는 전역 날짜에 맞춰 2주간 휴가증을 다시 끊어줬어요. 이런 도움으로 신부가 될 수 있었죠. 전역일에 귀대해 축하주를 얻어 마시고 다음 날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왔어요."

그의 해병대 입대 동기들은 '나라 사랑 후배 사랑' 장학금 1억원을 서강대에 약정했다. 해병대를 전역한 서강대생을 대상으로 한 학기에 두 명씩 500만원을 수여한다. 이런 장학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2009년 제가 대학원장을 할 때 입대 동기들과 연락이 됐어요. 해병대에 입소한 게 1969년이니 딱 40년 만이었지요. 동기라고 해도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진해 훈련소에만 함께 있었을 뿐인데도 그렇게 반가운 거예요. 두 달에 한 번씩 갖는 모임의 의미를 살리자며 '해병대 장학금'을 만든 거죠."

―대학 이사장인데 해병대 출신 학생에게만 장학금을 주면 말이 안 생길까요?

"다른 군(軍) 출신들도 그렇게 장학금을 모아 후배들에게 주면 되지(웃음). 사실 그런 얘기도 나왔어요. 앞으로 장학금 수여 대상을 넓힐 필요가 있겠지요."

―당초 어떤 계기로 신부가 될 마음을 먹었습니까?

"고교 시절 다니던 성당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이 계셨어요. 프랑스는 우리보다 잘사는데,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사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 신부님을 잘 도울 수밖에 없었죠. 한번은 신부님이 저녁을 초대하셨는데 딱 이 말만 기억나요. '안드레아(김정택 신부의 영세명), 사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의사가 되는 것'이라고 해요. 제가 의과대학에 가고 싶어 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좌절된 걸 알고 있었어요. 제게 사제의 길을 권한 것이죠. 저도 그때는 영혼의 의사가 육신의 의사보다 더 의미 있게 들렸어요."

―가톨릭 집안이었습니까?

"집안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영세를 받았어요. 신학교에 진학했을 때 어머니는 몹시 섭섭해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신학교에 갔다면 본당 사목을 하는 교구 신부를 떠올립니다. 수도회는 어떻게 선택하는 겁니까?

"하느님도 수도회 숫자를 다 모른다는 것 아니에요(웃음). 남자 수도회는 100개, 여자 수도회 200개쯤 돼요. 수도회마다 설립한 성인(聖人)의 정신과 가치관이 있죠. 자신에게 맞는 걸 선택하는 겁니다."

―이 중 예수회 소속 신부가 된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 예수회 소속 신부가 몇 분 와있었어요. 박홍(전 서강대 총장) 신부님도 그때 만났어요. 이분들의 영향도 받았지만, 예수회(1540년)를 설립한 스페인의 성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좋았어요. 그분은 중세의 기사였지요. 예쁜 마누라를 얻고 출세하고 여인들에게 봉사하는 게 최고 가치였죠. 그러다가 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개심(改心)했지요. 세속의 기사에서 하느님의 기사가 된 거죠."

―예수회 가치관의 핵심은요?

"대부분 수도회는 '청빈·정결·순명'을 3대 신조로 삼아요. 예수회는 제4 신조가 있어요. '교황이 명하면 이 세상 어느 곳이든 간다'는 거죠. 교황을 비롯한 교계 제도와 질서에 철저히 복종하죠."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청빈한 생활이 화제였지요?

"교황님은 주교 시절부터 주교관에 안 살고 아파트에 거주하며 혼자 밥을 해먹었어요. 아르헨티나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지요. 예수회를 떠나서 정말 훌륭한 분이죠. 이분이 보여준 행동이 우리 교회가 나갈 방향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도전이죠. 이분처럼 저 자신도 청빈한 삶을 살고 있는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서강대와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시절 세간에 잘 안 알려진 필화 사건(1976년)에도 연루됐다. 한 예수회 수사(김명식)가 '10장의 역사 연구'라는 시국 풍자시를 썼다. 몇몇 예수회 친구들이 나눠 타이핑, 인쇄, 배포를 했다. 그는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찰에 모두 체포됐다. 시를 쓴 친구는 징역 3년, 타이핑과 인쇄는 징역 1년을 살았다.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그 뒤 그는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했고, '집단 무의식' 이론의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에게 심취하기도 했다. 카를 융 학파의 공인을 받은 '정신분석가' 자격증도 땄다. 요즘 통용되는 '성격유형검사' 한국판을 20년 전에 만든 이도 그였다.

―하느님의 사제가 됐으면 충분하지, 왜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는 게 많지 않아요. 심리학은 저 자신을 깊이 아는 데 도움이 되죠.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니까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과 숨어있는 무의식이 있지요."

―심리학으로 자신의 어떤 면을 알게 됐습니까?

"아직도 내 존재를 다 알지는 못해요. 다만 내 안의 어두운 그림자, 욕망도 봤습니다. 신부라고 해서 선한 의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카를 융은 '의식은 넓은 대양에 떠있는 작은 섬과 같다'고 했지요.

"넓은 대양이 무의식의 세계지요.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은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영역이지요. 그 속에 내재해있는 것을 찾아내고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것을 자기실현이라고 했지요."

―상담 심리 전문가의 덕목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듣는 귀가 없으면 상담을 못 합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만으로 심리적 치료가 이뤄질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가 넘쳐나지만, 정신적으로 퇴폐했어요.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죠.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삶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요."

―신부님은 '하느님 빽'과 '해병대 빽'에다 요즘은 '대통령 빽'도 있지요?

"제가 대학원장을 맡고 있을 때 '서강대 설립 50주년' 기념으로 동문인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했지요. 공교롭게 50번째 명예박사 수여자였어요. 서강대 명예박사 1호는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서 서강대의 위상도 올라갔나요?

"대통령 취임식 때 참석한 중국 사절단 30여명이 행사가 끝나고 곧바로 서강대를 방문했어요.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이라 대단하게 본 거죠."

그는 골프는 안친다. 주말마다 산행을 한다. 그가 소속된 등산 클럽도 꽤 된다고 했다.

―매년 히말라야 트레킹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수회 수사였다가 옷을 벗고 결혼한 친구가 있어요. 그 부부는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어요. 영세명으로 '대니와 젬마'로 불리는데, 북한산에서 4평짜리 카페에서 살았어요. 하루 두 끼 밥만 먹고 시간이 나면 산을 다녔어요. 저도 이 부부와 어울려 산행을 했지요. 그러다가 2001년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에 함께 트레킹을 간 게 계기가 됐어요. 3년 전 이 부부는 거처를 아예 네팔로 옮겼어요. 히말라야 고산 주민들을 돕겠다면서요. 저는 한국에서 이 부부를 돕는 후원회를 만들었어요. 매년 한 번은 꼭 히말라야에 가죠."

―삶을 돌아보면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까?

"결국 남는 것은 사람과 사랑입니다. 사람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통째로 내줬어요.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 이웃 사랑이 하느님의 가치입니다."

―술은?

"술 좋아합니다. 많이는 못 마시지만 폭탄주도 마셔봤어요. 언제 한잔합시다."

그는 인터뷰에 몹시 서툴렀다. 서론이 길었고 다른 쪽으로 말이 흘러가곤 했다. 한참 들어주다가 환기해야 했다. 그는 상대방이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참 귀했다.

▲27일자 A33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김정택 서강대 이사장' 기사 중 베트남전에서 사이공이 함락된 해는 1975년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