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5시쯤 울산의 R아파트 관리사무소 2층 사무실. 안내 데스크로 전화가 걸려왔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관리소장 좀 바꿔주세요."(주민)

"소장님이 두 분인데 어떤 소장님을 바꿔드릴까요."(직원)

"여자 소장님이요."(주민)

"네 알겠습니다. 소장님~ 전화 받으세요."(직원)

지난 3월부터 R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선 희한한 광경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관리소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오면 '소장이 두 명인데 남자요, 여자요?'라고 직원들이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위탁계약 분쟁으로 기존 S사 소속 관리소장·직원 8명과 새로 계약을 따낸 H사 관리소장·직원 8명이 3월부터 '어색한 동거(同居)'에 들어가면서 생긴 일이다. H사 소장은 여성, S사 소장은 남자다. H사는 '방 빼고 나가라'고 하지만, S사는 '못 나간다'고 맞서고 있다. 원래 8명이 근무하던 공간에 그 2배인 16명이 근무하게 돼 앉을 자리도 모자란다.

비슷한 시각 관리사무소에서 10m가량 떨어진 입주자대표회의 사무실에선 S사 소속 남자 관리소장이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다. H사가 '안방 차지'를 하면서 S사 직원들은 관리사무소에 간이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 있지만, S사 소장은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온 S사 직원이 입주자대표회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원이 "하자 민원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자, 소장은 "일단 적어만 둬"라며 직원을 돌려세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 아파트에선 오후 6시부터 일하는 당직 직원도 2명이다. 원래 1명씩 근무하지만, S사 당직자와 H사 당직자가 따로따로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지켜보니 1시간이 넘도록 두 당직 근무자는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S사와 H사의 분쟁은 '입찰가격 문제'가 핵심이다. 1004가구가 사는 이 아파트가 지난 1월 실시한 관리업체 선정 입찰에서 기존 관리업체인 S사는 '2년간 위탁관리수수료 24원'을 써냈고, H사는 '2년간 1원'을 써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올 2월 최저가를 써낸 H사로 관리업체를 바꿨다. H사 직원들 월급은 아파트 관리비에서 나간다.

하지만 S사는 "국토부에 문의해보니 위탁수수료가 월(月) 1원 이상이면 유효하다고 한다"며 "따라서 월 위탁수수료가 0.04원(1원÷24)에 불과한 H사가 선정된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S사는 법원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면서 관리소장 등 직원 8명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직원들 월급도 S사에서 대고 있다고 한다. 반면 H사 측은 "S사의 횡포가 심해 우리가 먼저 업무방해로 소송을 내려고 했다"며 "월 위탁수수료가 얼마이든 무효라는 법 규정도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1000가구 넘는 대형 아파트의 위탁수수료가 '1원'에 불과한 코미디 같은 상황은 이 아파트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아파트 관련 법규나 지침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국토부도 '월 1원 미만은 적합하지 않다'고 권고만 할 뿐 제재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1000가구 단지라면 2년간 2000만~3000만원가량 수수료를 받는 게 정상이지만, 입찰 때 제 가격을 써내는 업체는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제 살 깎아 먹기식 저가 입찰 경쟁은 각종 비리로 연결될 소지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관리업체가 청소·경비·조경 용역 업체 등을 따로 운영하면서 입주자대표와 결탁해 공사·용역비를 부풀리고, 뒷돈을 주고받는 비리 사슬이 형성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