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로 불렸던 로자 룩셈부르크(?~1919)는 논쟁을 몰고 다녔다. 살아서도 그랬지만 죽어서도 그랬다. 뛰어난 사상가들이 사후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룩셈부르크는 생년월일조차 논쟁거리였다.

대부분의 로자 룩셈부르크 전기는 그녀의 생년월일을 1871년 3월 5일로 기록하고 있다. 룩셈부르크가 취리히 대학에 제출한 신상명세서가 그렇고, 구소련과 동독의 당사(黨史)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태어나고 자란 폴란드의 전문가들은 1870년 3월 5일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출생신고서도 그렇지만 룩셈부르크의 부모나 언니, 오빠들이 한결같이 1870년생이라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본인보다는 탄생을 지켜본 가족들이 더 잘 알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상식을 거부하긴 어렵다.

두 가지 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고, 또 그깟 1년 차이가 무슨 대수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레닌이 1870년 4월 10일 태어났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돌연 그 1년 차이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무게로 다가온다. 1970년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야 했던 현실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그들에게 룩셈부르크의 탄생 100주년을 같이 기념해야 한다면, 그것은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농업 문제와 민족자결권을 비롯해 민주집중제와 중앙집권적 당 조직,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유보한 볼셰비키의 정강·정책들 및 이른바 레닌주의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방위적 비판을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있는 그대로 되살리자니,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의 의미가 크게 퇴색될 터였다. 현실사회주의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자유는 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라는 룩셈부르크의 슬로건을 들고 종종 반체제 시위에 나섰던 사실을 상기하자.

레닌이 현실사회주의의 화신이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판적 사회주의의 아이돌이었다.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도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마뜩하지 않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룩셈부르크는 대안적 사회주의의 원천이었다. 서유럽의 보수 우파에게 룩셈부르크는 '피에 굶주린 붉은 악마'였다. 보수에게만 그런 대접을 받은 건 아니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그녀는 '볼셰비즘의 적'이었으며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오류'의 총합으로 탄핵당했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그녀는 복권됐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는 맥락에 한정된 것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도 룩셈부르크는 푸대접을 받았다. 폴란드 독립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연방을 선호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신봉자였고, 그래서 찍힌 '민족 허무주의'라는 주홍글씨는 죽어서도 그녀를 쫓아다녔다.

유대인과 폴란드인은 물론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독일인까지 어울려 살았던 룩셈부르크의 고향 '자모시치'에 있는 그의 생가는 20세기 말까지도 작은 구둣방이 영업 중이었다. 박물관은커녕 '1870년 3월 5일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난 자리'라는 명판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설치되었다.

자본주의 서독에는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많지만, 사회주의 폴란드에서는 바르샤바 외곽에 달랑 '로자 룩셈부르크 전구 공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그나마도 이 공장은 폐허가 됐다. 반(反)유대주의 정서까지 공유한 폴란드의 민족공산주의자들에게 이 유대계 여성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념에 찬 국제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후세가 만든 강철 같은 혁명 투사의 이미지만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를 이해한다면 그 또한 일면적이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전 프랑스 귀족 문화의 진수와 쇠락의 미가 살짝 더해져 고도의 세련미로 형상화된 그림'을 즐겼고,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선호했다. 이런 그의 고급 취향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빈곤을 예술적 빈약함으로 뒤바꾼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의 문예 이론과는 상극이다. 그는 괴테, 쉴러, 아나톨 프랑스, 로망 롤랑, 모차르트, 베토벤, 티치아노, 렘브란트의 예술을 즐겼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를 성인으로 만들지는 말자. 논쟁에서 그녀는 자주 이분법적이었고 상대방의 명예 훼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건 사회주의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지금은 혼돈스럽다. 한때는 레닌과 다른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비쳤으나, 폴란드의 당 조직 내에서는 그녀 역시 이견을 용서치 않는 독재자였다. 레닌의 중앙 집중제를 비판하는 근거였던 노동자계급의 창발성은 자신의 노선과 일치할 때뿐이었다.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덧씌워 투쟁의 주체로 만들면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빼앗았다. 요기헤스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순종적이면서, 친구의 아들이자 두 번째 연인이었던 콘스탄틴 제트킨에게는 깐깐한 선생님이나 어머니처럼 군림했다.

나는 이 모순 때문에 룩셈부르크에게서 더 사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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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더 알고 싶다면…]

노동자 계급 다룬 '대중파업론'
사적인 편지 모은 '자유로운…'

먼저 룩셈부르크의 전기로는 파울 프뢸리히의 고전적 전기가 번역된 지 오래고, 역사와 소설의 혼합물인 막스 갈로의 전기가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토니 클리프의 짧지만 명쾌한 사상사적 전기도 있다. 반나 체르체나가 쓴 청소년용 전기도 번역, 출간되어 흥미롭다. 출간된 지 4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최고의 전기 자리를 잃지 않고 있는 피터 네틀의 전기, 최근 자료, 연구 성과를 반영한 구 동독의 룩셈부르크 전문가 아넬리스 라쉬차의 전기는 번역되지 않아 아쉽다.

최근에 '자본의 축적'이 두 권으로 번역되어 반갑다. 자본 주도의 지구화 현상을 설명하는 지렛대로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이론서로는 노동자 계급의 창발성 이론을 다룬 '대중파업론'과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서인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가 있다.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고 싶으면 사적인 편지를 모은 '자유로운 영혼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