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봄, 전보현(당시 9세)군은 부모의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어머니, 여동생과 셋이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전학 간 학교는 낯설었다. 다른 친구들이 학원에 갈 때 보현이는 학교에서 서성댔고, 친구들이 맛있는 것을 사 먹을 때 남은 급식 우유를 몰래 챙겼다. 가난이 너무 창피해 항상 억지로 웃었다. 보현이에겐 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창작 동요제에 나가는 친구들이 연습하던 '노래하는 숲 속'이란 노래를 어깨너머로 배워 흥얼거렸다.

어느 날 담임 최은주 선생님이 보현이를 불렀다. "보현아, 너 노래 아주 잘한다. 음악 배워보지 않을래? 선생님이 도와줄게." 보현이는 뛸 듯이 기뻤다. 최 선생님은 보현이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악보 볼 줄도 모르던 보현이에게 선생님은 발성하는 법, 악기 다루는 법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알려줬다. 여학생만 들어갈 수 있었던 합창부에서 보현이가 노래할 수 있게 해줬고, 풍물부 활동도 하게 해줬다. 학원엔 못 갔지만, 방과 후에 선생님과 매일 머리를 맞대고 음악 공부를 했다.

오늘 스승의 날… 이 땅의 모든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사진 위)담임 선생님에게…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서울 성동구 금복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외국인 교수들에게… 14일 오후 부산 사상구 신라대학교 내 예락뜰에서 이 대학 총학생회가 외국인 교수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사진 아래)할머니 학생이 젊은 선생님에게… 14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성지중고등학교에서 성인반 학생들이 젊은 선생님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그 보현이가 '음악 선생님'이 됐다. 중앙대와 국립전통예술고에서 국악을 가르치는 전보현(28)씨는 "최은주 선생님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내 평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그는 선생님이 '음악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누군가 저를 위해 도와준다는 말을 들은 게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전씨는 선생님과 연락이 끊겼다. 2011년 교육청 '스승 찾기' 서비스를 통해 선생님이 서울 월촌초 교장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한달음에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선생님은 전씨 손을 잡고 "정말 잘 컸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씨는 선생님의 지금 제자들에게 음악 공연을 선물했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로 올라온 선생님은 "우리 제자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하며 전씨를 꼭 안아줬다.

15일 스승의날을 맞아 대한적십자사가 개최한 '선생님과 함께한 추억과 사연 이야기 공모'에서 전씨는 최 선생님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생님'으로 소개했다. 25일간 '우리 선생님' 얘기 765편이 모였다. 제자들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선생님의 크고 눈부신 사랑이 담겨 있다.

서울 고려대사대부고 2학년 이재익(16)군은 귀에 새끼손톱만 한 보청기를 끼고 있다. 청각장애 3급인 재익이는 작년까지 친구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친구한테 '한 번만 더 얘기해 줄래?' 하자 그 애가 '한 번에 좀 못 알아듣느냐?' 하고 휙 가버렸어요. 그때 마음을 닫았던 것 같아요." 재익이는 '외톨이'로 지냈다. 쉬는 시간에 책만 읽었고, 모르는 게 생겨도 묻지도 않았다. 이현주(30) 선생님은 이런 재익이의 마음을 두드렸다. 2학년 담임이 되자마자 재익이를 불러 상담했고, 재익이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친구가 꼭 필요한가요?" 이 선생님은 재익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게 상처를 준 친구들은 기억조차 못 하고 살 텐데,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마음을 꽁꽁 닫으면 네가 지는 거야. 상처는 누구나 받는 거야. 네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널 무시하는 애는 거의 없어." 그 뒤 이 선생님은 매일 재익이에게 '오늘은 누구랑 얘기했니?' 하고 물었다. 재익이 표정이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이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된 재익이를 얼마 전 사생 대회에서 만났다. 이 선생님은 "재익이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친구들에게 달려가 '우리 친하잖아!' 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거예요. '정말 달라졌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코끝이 찡했어요"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초등학교 4학년 김태혁(가명·9)군은 "선생님이 나를 살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따로 불러 때렸어요. 계단이나 운동장, 화장실 등 여러 곳에서 맞았습니다. 그땐 학교 가기가 무서워서 학교에 간다고 하고 다른 곳에 간 적도 있어요." 김군을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선생님들의 무관심과 오해였다. 김군은 "과거엔 (학교 폭력의) 증인도 없고, 맞은 사실을 바로 얘기하지도 못해 모든 게 내 잘못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작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곤 달라졌다. "이전 선생님들과는 달리 저를 언제나 믿고 안아주신 우리 선생님! 선생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저는 학교생활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선생님 한 분의 사랑과 관심이 저를 살려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