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비서실장

어버이날의 붉은 카네이션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정의 달 5월이다. 내 어머니가 하늘나라 아버지 곁에 가신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런데 내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을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는 굴곡 많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분들이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노고 위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지나친 생각이 아닐 것이다.

76세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기억할 때면 이상하게도 나이 드신 어머니가 아니라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거동조차 못하셨던 어머니의 말년을 인정하기 싫은 내 무의식 때문일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다리가 너무 아프셔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방바닥을 기거나 앉아서 움직이셨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 나는 어머니께 자주 짜증을 냈다. 정작 다리가 아프신 어머니는 오죽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다.

초등학교 때는 수업 참관에 오신 어머니를 애써 외면하곤 했다. 분 냄새와 화려한 옷차림의 다른 어머니들 가운데 내 어머니는 가장 나이 들어 보이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대신 온 것으로 생각할까 봐 어린 마음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평생 몸집만큼 커다란 옹기를 머리에 이고 장사 다니셨던 어머니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리고 주름이 가득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다가 옹기를 이고 배달 나가시는 어머니를 보면 얼른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한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고 아들 삼형제를 모두 사제로 바치신 어머니는 홀로 지내시다가 주무시듯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알록달록한 '몸뻬'를 입고 낮잠 주무시듯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자 나는 목이 메었다.

평생 쉼 없이 일하셨던 어머니는 늘 몸뻬를 입으셨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못마땅했다. "엄마, 일 안 하실 땐 다른 옷 좀 입으면 안 돼요?" "그런 소리 마라. 이 옷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을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던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몇해 전 꿈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어릴 때 살던 집으로 가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어머니는 참 편안한 모습이었다. 생전에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어느 순간 나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있었다. 등에 업히신 어머니는 내 귓가에 가만가만 속삭이셨다. 집으로 향하는 비탈길에서, 어머니의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서 마음이 몹시 아팠다. 꿈속에서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꿈에서 깬 후에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한 번도 업어 드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느다란 허리가 휘도록 나를 업어주셨는데 말이다. 문득 어머니와 함께 갔던 장소를 떠올려 봤다. 그런데 왠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족들이 함께 외출을 하더라도 어머니는 늘 홀로 집을 지키고 계셨다.

맛난 음식은 자식들에게 주시곤 늘 찌꺼기 음식만 잡수셨던 어머니, 조기 한 마리라도 상에 올리시면 맨 나중에 앙상한 뼈만 발라 잡수시면서도 "뼈가 제일 영양분이 많단다" 하시며 우리를 안심시키셨던 어머니. 어려운 시절, 식구 숫자에 딱 맞춰 밥을 지었는데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당신의 밥을 손님 몫으로 내놓고는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들이켜곤 하셨다. 사정을 모르는 우리가 "엄마는 왜 안 드세요?" 하면 "엄마는 속이 안 좋아…" 하셨던 어머니. 그땐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 그분의 이름은 '어머니'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다 똑같을 것이다.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했다(요한1서 4장8절). 나는 '하느님은 어머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하려고 어머니를 창조했다"는 외국 격언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이가 들수록 미치게 보고 싶어지는 사람은 바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어머니를 여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잡고 있는 마지막 끈이 끊어지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나를 무조건 감싸주고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또 뵙고 싶다. 그러면 생전에 한 번도 못 드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