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가구가 넘는 중대형 단지인 경기도 광명시의 H아파트에선 몇 년 전부터 "관리소장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구체적이었다. 12년간 관리소장을 맡은 강모씨의 월급은 220만원. 그런데 어떻게 강씨의 두 대학생 딸이 해외 유학을 하고, 강씨 부부가 매년 한두 차례씩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느냐고 주민들은 수군댔다.

2011년 새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는 입주한 지 16년 만에 처음 회계 법인에 비리 적발 감사를 맡겼다. 관리소장을 다른 사람으로 바꾼 뒤였다.

본지 취재팀이 감사 보고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감사로 밝혀진 비리는 소문을 뛰어넘었다. 불법 수의계약과 공사비 부풀리기가 밥 먹듯 이뤄졌고, 증빙 서류도 없이 이상한 명목을 붙여 관리비를 횡령한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는 "한마디로 아파트 비리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광명 H아파트 비리 백태, H아파트 2010년 공사계약 목록

◇도장 공사, 3배 금액에 수의계약

감사에선 2006년부터 5년 반 동안 실시된 아파트 공사 77건 중 50건이 수의계약으로 이뤄진 사실이 적발됐다. 주택법 시행령이 200만원 이상 공사는 입찰 최저가를 써낸 업체에 맡기도록 규정하고 있어서 수의계약은 불법이다.

수의계약으로 집행한 공사비는 모두 33억4471만원. 2009년 S업체가 수의계약으로 따간 아파트 외벽 도장 공사비는 5억2800만원이었지만, 인근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 한 비슷한 규모의 공사비는 1억7000만원에 불과했다. 경쟁 입찰인 척 눈속임을 하고 실제론 수의계약으로 이뤄진 공사도 많았다. 2010년 아스콘 포장 공사는 K건설이 4억7124만원에 '경쟁 입찰'로 따갔지만, 실제론 1억3000만원 이상 낮은 3억4100만원을 써낸 업체가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에서 적발됐다.

공사비가 증발한 경우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아파트 회계장부에는 승강기 유지·보수 비용으로 2007~2008년 2년간 2억5000만원을 업체에 지급했다고 돼 있지만, 실제 업체가 유지·보수공사에 쓴 돈은 그 4분의 1가량인 6000여만원에 불과했다.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는 "관리소장이나 전임 입주자대표들이 업체의 '뻥튀기 견적서'에 속았든지, 아니면 업체와 짜고 횡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재활용품 매각 계약도 이상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아파트 회계장부를 보면 2009년 7월부터 2년간 재활용품 매각 수입은 480만원으로 기록돼 있다. 2년간 480만원을 받기로 수거 업체와 수의계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입주자대표회의가 공개 입찰로 계약했더니 그 25배인 1억2000만원(2년간)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무릎부상 위로금''체력단련 식대'

감사에선 뭔지 선뜻 납득하기 힘든 명목으로 관리사무소가 비용을 지출한 경우가 수십 건 적발됐다. 관리비를 3만원 이상 집행할 때는 카드 영수증 등 증빙 서류가 있어야 하지만, 손으로 쓴 영수증만 있거나 그나마도 없는 지출의 합계가 1억원이 넘었다.

예컨대 2011년 5월 20일 집행한 '체력 단련비' 항목을 보면 회계장부상에는 200만원을 지출했다고 적어 놓았으면서도 수기 영수증 206만3800원어치가 첨부돼 있고 지출 장소는 음식점 이름으로 추정되는 '○○가든'으로 적혀 있다. 또 2009년 5월 4일 '체력 단련 중식대' 항목에는 55만원을 '△△△식당'에서 썼다며 수기(手記) 영수증을 붙여놓았다. 그러나 모두 6명뿐인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생태탕 전문 식당인 이곳에서 어떻게 점심 한 끼 값으로 55만원을 쓸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장부에만 있고 영수증이 없는 항목 가운데는 '관리소장 무릎 부상 위로금'(10만원·2007년 10월 23일) '직원 포상금'(100만원)도 있었다.

주민들은 "이마저도 찾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관리소장 강씨와 직원들이 그만두면서 컴퓨터에 파일로 보관하던 회계 관련 자료들을 모두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