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고 불리던 배우 남궁원은 장신(長身)과 서구적 얼굴로 여심(女心)을 휘어잡았다. 그의 키는 당시로서는 거인에 가까운 180㎝. 큰 키는 절대적 동경의 대상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영양부족 상태에 시달렸던 한국인은 자녀만큼은 큰 키를 갖기를 소망했다. 1980년대 우유 광고는 '우유로 키를 키워 주세요'라고 '큰 키 마케팅'을 했다.

키에 대한 이런 집착과 영양 상태 개선으로 해방 후 50년 동안 쭉쭉 잘 자라기만 하던 한국인의 몸집이 지난 10년 동안 서서히 줄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들은 1964년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커오다가 지난 10년 사이엔 키가 0.4㎝ 정도 작아졌다. 198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크다가, 2003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여학생도 마찬가지다. 21세기 한국인은 왜 점점 작아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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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의 천장'… 유전적 성장 한계점에 왔다

1964년 163.6cm, 1974년 166.5cm, 1984년 168cm, 1994년 171cm…. 한국인의 키는 빠르게 자랐다. 그런데 2003년 성장이 뚝 멈췄다. 한국 고3 남학생들의 평균 키 최고 기록은 2003년의 174㎝다. 지난해 키는 173.6㎝로 10년 전보다 0.4㎝ 줄었다.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이같은 '키의 천장' 현상은 시기만 다를 뿐 다른 선진국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일본은 1994년 170.9㎝로 정점을 찍은 후 키가 더는 자라지 않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에 다다른 평균 175㎝가 한계로 여겨진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유한욱 소장은 "2003년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선진국이 키에 대해선 '유전적 성장 한계' 지점에 도달했다. 이 상태는 영양부족 등 환경적 방해 요인이 전부 제거돼 잠재력이 완전히 달성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키를 키우는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김희발 교수는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180개 정도 밝혀냈지만, 이 정도로는 왜 집단별로 키의 한계치가 다른지 알아내기 어렵다. 대륙에 비해 고립된 일본 같은 섬나라는 유전자군(群)이 적어서 키가 큰 민족의 유전자가 유입될 확률이 낮아 키의 한계치가 작다고 추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왜 작아지나①: 비만 공포에 "이제 그만 먹어라"

한국인은 큰 키와 함께 비만이라는 특성을 함께 얻었다. '키의 천장'에 부딪힌 상태에선 '고기 반찬'을 매일 먹는다 한들 더는 키가 자라지 않는다. 살만 찐다. 살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면서 '덩치 좋은 미남'에 대한 갈증은 사라졌다. 대신 날렵한 몸에 대한 선호, 뚱뚱한 몸매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영양 섭취가 키로 전환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비만 인구도 팽창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청소년의 비만 비율은 1980년대 2%였다가 1997년 6%, 2007년 11%로 크게 늘었다.

2000년대 들어 '게을러 보인다' '둔하다'같이 살찐 사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려는 욕구가 사회 전반적인 다이어트 열풍을 불러왔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까지 다이어트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가수 비 같은 '식스팩 몸짱'의 전성기는 2000년대 후반 막을 내렸다. 대신 가느다란 몸매에 여성을 연상케 하는 외모를 자랑하는, 장근석 같은 '예쁜 연예인'이 급부상했다. 일본의 '성장'이 멈춰선 1990년대에 '여성화된, 자기 가꾸기에 열중하는 젊은 남성'을 뜻하는 '초식남'이 등장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웃통 벗는 현빈'의 시대가 '감싸주고 싶은 태민('샤이니' 멤버)'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코오롱FnC 마케팅팀 양문영 차장은 "어느 브랜드를 막론하고 요새는 딱 떨어지는 이른바 '슬림 핏'이 대세"라며 "특히 20~30대를 겨냥한 브랜드들은 경쟁적으로 더 날렵하고 몸에 붙는 모양의 옷을 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날씬하다'가 미의 조건으로 자리 잡자 엄마들의 식탁 앞 잔소리는 '많이 먹어라'에서 '덜 먹어라'로 변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동경하는 연예인을 보면서 다이어트에 열을 올린다.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이정은 교수는 "체중 감량이 필요없는 정상 체중 청소년이 과도하게 다이어트를 할 경우 '자발적 저영양 상태로 인한 저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왜 작아지나②: 과도한 영양으로 성장판 빨리 닫혀

정반대로 영양을 필요보다 많이 섭취하는 아이들이 늘어 성장판이 일찍 닫히게 됐다고 설명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채현욱 교수는 "과도한 칼로리는 성(性)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 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초경(初經)이 당겨지는 등 2차 성징이 빨리 나타난다"고 말했다. 예전보다 '어른'이 빨리 되고, 따라서 성장이 그만큼 빨리 멈춘다는 뜻이다.

기술표준원이 5~7년마다 발표하는 표준 한국인 자료(19세 남성 기준)를 보면 1997~2004년 한국인의 몸무게가 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었다. 이 기간 한국인의 키는 1.8㎝ 커졌는데, 몸무게는 4.2㎏가 늘었다. 평균 키가 한계에 부딪히게 된 2003년을 향해 가던 시기에, 몸무게의 급팽창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유한욱 소장은 "성장의 여력이 남아있을 때는 많이 먹는 것이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처럼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상태라면 음식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성조숙증을 막아서 성장을 오히려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왜 작아지나③: 잠 못 자고 운동 못하고

키가 크는 데 중요한 것이 운동과 수면이다. 과도한 공부 경쟁에 시달리는 한국 아이들은 그런데 점점 덜 자고, 덜 움직이고 있다. 청소년 수면시간은 10년 전보다 감소 추세다. 1992년 8시간 48분이었던 초등학생의 수면 시간은 2009년 8시간 38분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중학생의 수면 시간도 7시간 48분에서 7시간 38분으로 감소했다. '키 크기' 측면만 보면 심각한 개악(改惡)이다. 미국수면재단이 권장하는 하루 적정 수면 시간은 8시간 30분. 지난 4월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실제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 12분에 불과하다. 운동도 부족하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초등학교 5·6학년과 중·고등학생의 3분의 1이 '일주일에 30분도 운동한 적 없다'고 답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채현욱 교수는 "키가 크려면 방해 요소들이 없어야 한다. 성장기에 충분한 운동 시간과 수면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영양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클 수 있는 만큼 자라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