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7월 중국 베이징의 민가에서 만난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왼쪽)와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

1997년 2월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외에도 당시 한국 측과 접촉했던 북한 고위층이 2명 더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아직도 북한 권부(權府) 내에 건재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같은 사실은 《월간조선》5월호에 실린 김용삼(金容三) 전 《월간조선》편집장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황장엽 망명 당시《월간조선》기자였던 김용삼 전 편집장은 당시 비밀조직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회장 이연길) 중앙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 과정 내막을 지켜볼 수 있었다.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이연길 회장은 6?25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가 운영하던 대북(對北)첩보부대인 켈로(KLO)부대의 한 지대(支隊)인 고트부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북한 내 유력세력과 연대(連帶)해서 김정일을 암살 혹은 제거하고 북한 내에 개방적인 정권을 수립해야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만들고, 북한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일종의 사설(私設) 공작망을 구축했다. 다음은 김용삼 전 편집장의 증언.

소규모 무역업을 하던 이연길 회장은 1995년 5월경 려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사장을 알게 됐고, 김 사장을 통해 황장엽 비서와 접촉하게 됐다. 황장엽 비서 망명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사실인데, 이연길 회장은 우선 황장엽 비서의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을 구상했다. 황경모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현재 북한의 최고실세로 알려진 장성택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던 황경모는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와 호위총국 내에 두텁게 형성돼 있는 인맥을 활용해 김정일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경모와 그의 동지들은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 해외에 내다 팔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북한 반탐(反探)기관이 이 사실을 포착했다. 조카사위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장성택은 간염을 핑계로 황경모를 급하게 군병원에 입원시켰다. 황경모는 장성택이 만들어준 알리바이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아버지가 망명한 후인 1999년 비밀리에 처형됐다.

1996년 7월 3일 중국 베이징의 한 민가에서 이연길 회장과 비밀리에 만난 황장엽 비서는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북한) 사람이 박혀 있다(북한 첩자가 한국 권력층에 침투했다는 뜻이다).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덕홍 사장은 그 전날 이연길 회장에게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 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보라고 하기에 내가 꺼내보았다. 그 내용을 본즉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이 제보자와 나눈 대화록이었다”면서 “김광일과의 대화자가 바로 북한에 이런 내용을 제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청와대 내에도 불순세력이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여 김광일 비서실장 주변을 조사했고, 김광일 비서실장도 이 문제로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광일 실장은 자기 친구이자 재일교포인 김00(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만나 북한에 보고된 내용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 사장의 요청으로 우리 정보기관을 통해 입에 넣고 깨물면 터지는 자살용 극약 앰풀(황장엽에게 전달됨)과 자살용 만년필 독침(김덕홍이 소지함)을 구해서 건네주기도 했다.

황장엽 비서는 1996년 말 김덕홍 사장을 통해 1996년말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의 대리인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해 주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2003년 6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전 대남담당 비서였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은 아직도 북한 최고위층 인사로 건재하다.

황장엽 망명 당시《월간조선》기자였던 김용삼 전 편집장.

황장엽 비서와 김덕홍 사장은 원래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 체제 전복을 꾀했으나, 감시가 심해지면서 망명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한국으로 들어온 후 1980년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했다. 《월간조선》김용삼 기자와 인터뷰(1998년 7월호 게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김덕홍 사장은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광주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강력하게 보도 자제 협조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이 증언은 기사화되지 못했다.

과거 논란이 됐던 ‘황장엽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연길 회장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 후 임복진 전 의원(당시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장)에게 황장엽 망명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데, 안기부는 마치 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처럼 흘려 대선을 앞둔 야당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면서 “《조선일보》가 황장엽 망명사건의 전 과정과 본질을 사실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안기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가 사전에 봉쇄됐으며 결국 이것이 김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5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