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아일랜드)=김수혜 기자

아일랜드 항공사 에어링거스에서 열다섯 살 케이트의 하루는 적당히 구경하는 느슨한 일정이 아니었다. 첫날 오리엔테이션에 가보고 케이트는 자신의 일정이 분 단위로 짜여 있다는 걸 알았다. 둘째 날부터 승무원·고객서비스팀·청소팀·화물운반팀을 숨 가쁘게 따라다니며 잡무를 거들었다. 모형 비행기에서 조종 훈련도 받았다. 케이트는 "어려서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꿈꿨는데, 직업 체험을 통해 '항공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고 했다.

아일랜드 10대들에게 물었다. "배에 타고 있는데 풍랑이 덮쳤다. 살아남으려면 ①명문대 졸업장 ②좋은 직장 ③재미있는 일 ④고액 연봉 ⑤가족과 애인을 하나씩 던져야 한다. 어떤 순서로 버리겠느냐?"

더블린 중심가에서 만난 잭 질레스피(16)군은 "맨 먼저 학벌부터 던지겠다"고 했다. 잭은 전환학년(Transition Year)을 맞아 평소 꿈꾸던 대로 금융회사에서 직업체험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장, 연봉, 회사, 일, 가족과 여자 친구 순서로 포기할래요. 물론 명문대 가고 싶죠. 하지만 트리니티대학(아일랜드 최고 명문대) 안 나와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돼요. '성공한 스물다섯 살'이 뭐냐고요? 무슨 일을 하건 자기 자리에서 행복한 사람이죠. '실패한 스물다섯 살'이요? 그때 가서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겠죠."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 캐빈틸리 공립학교 학생들은 올 초 시내 방송국에 가서 대본 작성부터 녹음까지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 과정을 직접 해봤다(왼쪽). 또 세인트킬리언스독일학교에 다니는 케이트 챔버스는 항공사에서 직업체험을 했다. 전환학년 기간 동안 아일랜드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다양한 실습과 직업체험을 한다.

아일랜드 학제는 '유치원 2년→초등학교 6년→중학교 5년'이다. 중3 마치고 한국 연합고사에 해당하는 '중등학력인증시험'(Junior Certificate)을 본다. 곧바로 중4년이 되는 대신 1년 동안 다양한 실습과 직업체험을 통해 학생 스스로 앞길을 정하는 것이 전환학년 제도다. 5년이면 졸업할 중학교를 6년 걸려 마치는 대신, 서른 다 돼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헤매는 상황을 줄일 수 있다.

아일랜드는 이 제도를 1974년 도입했다. 첫 20년 동안은 참가자가 10% 안팎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환학년을 거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대학도 잘 가고 사회 적응도 잘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왔다. 지금은 10명 중 7명이 전환학년을 택한다.

전환학년 기간에는 학생들의 일상이 바뀐다. 제리 제퍼스 국립아일랜드대 교수는 "아이들이 학과 공부를 잠시 밀어놓고, 인생 그 자체를 실감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전환학년 커리큘럼의 특징"이라고 했다. 이 기간 정규 교과목은 영어·수학·아일랜드어 등 필수과목에 국한하고, 나머지 시간에 4~8주짜리 '미니 강좌'(Module)가 이어진다. 사진·미술·뮤지컬 같은 예체능 강좌도 있고, 요리·목공·미디어 제작 같은 실습 강좌도 있고, 아이들이 직접 팔찌나 간식을 만들어 파는 창업 실습도 있다. 요양원·마약중독치료센터·난민보호시설 등에서 최소한 1~2주일 이상 봉사하게 하기도 한다.

핵심은 역시 '직업체험'이다. 전환학년 학생들은 일 년에 최소 두 차례 이상 직업체험을 나간다. 저마다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한 다음, 각자 그 분야 직장을 섭외한다. 현장에서 직장인 '선배'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고 잡무도 거든다. 체험 자체는 1~2주일이지만, 상담·결정·섭외·실행·사후 토론하는 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까지 걸린다. 과정 전체가 살아있는 진로교육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아이들은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펴든다. 클롱고스학교 4학년 매튜 코인(17)은 지난해 전환학년을 마쳤다. 올해부터 의대 진학을 준비 중이다. 매튜는 "로펌·물리치료실·종합병원에서 각각 직업체험을 했는데 그중 외과의사를 따라다닐 때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업체험 후에 자신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전환학년이 모두에게 걸맞은 직업을 찾아내주는 '요술 방망이'는 아니다. 매튜의 친구 킨 브라운(17)은 "동물원·자동차공장·농장에 갔는데 '이거다' 싶은 직업이 없었다"고 했다. 그럼 아이들이 실망할까? 꼭 그렇진 않았다. 킨은 "'이건 정말 내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내기만 해도 다행 아니냐"며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