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션 거장들이 유럽을 뒤흔들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뜻밖에도 우리는 정체기를 겪었다. 한국과 중국의 디자이너들이 그 침묵 사이로 빠르게 성장했다. 난 다른 길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만의 길이었다."

지토세 아베(Abe·48)는 현재 일본 패션 디자이너 3세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이세이 미야케(75)가 가위질의 흔적이 없는 '한 장의 천'으로 컬렉션을 완성해 파리를 사로잡았고, 레이 가와쿠보(71)와 준야 와타나베(52)가 건축적이고 전위적인 옷으로 전 세계 패션 비평가를 움직였다면, 지토세 아베는 말 그대로 '입고 싶은 옷'으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선 경우다. 23일 아베를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관 '분더샵컴퍼니'에서 만났다. 아베의 브랜드 '사카이'의 팝업스토어가 있는 곳이다. 새장처럼 지어진 화려한 팝업 스토어에서 아베는 환하게 웃었다. "한때 동양 디자이너들은 진지하고 엄숙한 질문을 던지려고 애썼지만, 전 그것보단 제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려고 했어요. 옷의 본질이나 옷의 구조 같은 현학적인 질문은 리본과 레이스 사이에 슬쩍 감춰뒀죠."

23일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분더샵컴퍼니에서 만난 지토세 아베. 그는“열다섯 살짜리 딸과 함께 있을 땐 보통 엄마지만, 옷 만들 때만큼은 완전한 여성이 된다”고 말했다.

취향이 먼저, 철학은 나중에

아베의 옷은 당의정(糖衣錠)과도 같다. 철학적 질문보단 달콤하고 매혹적인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누구나 입는 바이커 재킷도 그녀가 만들면 손으로 촘촘히 엮어낸 자수와 니트 레이스가 뒤덮인 새로운 차원의 옷이 된다. 치렁치렁한 니트 드레스는 앞에서 보면 원피스지만 뒤에서 보면 재킷과 블라우스를 겹쳐 입은 꼴이다. 폭이 넓은 남자 바지는 뒤에서 보면 치마가 된다. 앞과 뒤가 다르고 속과 겉이 다르다.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Lagerfeld)가 2013년 가을·겨울 파리 컬렉션을 보고 "'사카이'의 컬렉션이 최근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베의 브랜드 '사카이' 2013년 SS컬렉션.

아베는 1989년 일본 패션계의 대모(代母) 레이 가와쿠보가 만든 '꼼데가르송'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다. 레이 밑에서 패션 업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준야 와타나베의 컬렉션을 론칭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면서 1997년 회사를 그만뒀고, 아베는 자신만의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여성스러운 옷으로 정체(停滯)를 넘다

다른 일본 디자이너들이 성공적 데뷔를 위해 해외 컬렉션을 여는 것과 달리, 아베는 사업부터 시작했다. 작은 가게를 냈고 그녀만의 니트 컬렉션을 만들어 팔았다. 금세 사람이 몰렸다. 인기를 얻었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2010년에 첫 파리 컬렉션을 열었다. 아베는 "평단의 눈에 들기 위해 옷을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즐겁자고 옷을 만들었다. 평단의 마음을 얻은 건 나중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가요? 전 다른 디자이너들의 컬렉션도 잘 안 봐요. 그저 제 취향을 곱씹고 또 곱씹습니다. 이게 제3세대 디자이너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르죠. 선배들이 '옷이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전 '입고 싶은 옷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거죠."

아베는 "아시아에선 패션 업계 선두주자였던 일본을 어느덧 한국이 바짝 쫓아왔지만, 아직까진 한국도 개념(Concept)으로 먼저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禪)이나 공(空) 같은 철학도 결국은 쉽게 편하게 걸치는 옷에서 은근히 묻어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난 그래서 소재를 뒤섞고, 남녀의 복식을 뒤바꾸고, 그 속에서 가장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방식을 찾았다. 그게 곧 독창성이 됐다. 어차피 패션은 예술인 동시에 상업 아닌가. 거장 선배들을 흉내 내다 지쳐 그만두는 것보단, 홀로 다른 길을 걷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