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창조경제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창의적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경제'라는 원론적 해석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장 능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런 의미의 창조경제는 한국 경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슬로건으로서 제격이다.

한국 경제의 경제 발전 단계상 모방 경제는 더 이상 성장 전략으로서 유효하지 않다. 모방의 효율성을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아 성장해온 한국 경제가 성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갈수록 모방할 대상도 줄어들고 모방이 용이하지도 않다. 그렇다 보니 투자할 곳을 찾기도 힘들고 생산성도 오르지 않는다. 성장 잠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투자처를 찾으려면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려면 모방이 아닌 창조가 필요하다.

모방 경제에서 창조경제로 넘어가기 위해 과학기술만큼 중요한 것이 금융의 역할이다. 모방 경제보다는 창조경제에서 기업 활동의 성과는 더 불확실하고 성과를 얻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더 길다. 이런 기업 활동에 금융 자원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위해서는 금융과 기업 간에 장기적이고도 긴밀한 관계가 형성돼 있어야 한다. 창조경제에서 요구되는 금융의 역할이다.

한국 경제에서 금융이 실물경제에 자금을 공급하는 형태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천해 왔다. 1980년대 이전 개발 경제 시대 금융 자원 배분은 정책금융을 매개로 한 '정부 주도의 관계형' 구조로 이루어졌다. 변변히 축적된 자본도 없이 기업가 정신 하나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던 개발 경제 시대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창조경제 이상으로 기업 성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 시기였다. 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만한 위험 관리 능력이 있는 금융기관은 부족했던 반면 축적된 자본이 변변치 못했던 기업들의 자금 수요는 항상 차고 넘쳤다. 자율적 시장이 형성되기에는 수요와 공급의 간극이 너무 컸고 그 간극을 정부가 메워주었다. 정부가 나서서 금융기관과 기업을 연결해주었고 정책금융을 통해 자금이 공급되었다. 민간경제 규모가 크지 않았고 구조도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민간경제를 통제하고 조율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시기에 정부 주도의 관계형 금융은 효율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민간경제가 발전해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져 감에 따라 정부 주도의 금융 자원 배분 기능은 효율성을 잃어갔다. 정부와 금융 및 기업 간의 긴밀한 관계는 유착 관계로 변질됐다. 금융 중개 기능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대안으로 '시장'이 선택됐다. 금융시장 기능 강화를 위해 1990년대 이후 20여년에 걸쳐 금융 자유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지난 20여년의 실험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금융 자유화 초기 정부의 개입 관행이 여전한 채 자유화만 급속히 진행된 결과 과도기적 혼란이 발생해 외환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고 설익은 벤처기업 육성 정책이 벤처 거품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정부와 민간의 유착 관계를 끊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금융과 기업의 관계마저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위험성 있는 기업 부문 자금 공급은 크게 위축된 반면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가계 부문으로 자금이 몰렸다. 대규모 가계 부채 문제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형성된 현재의 금융 중개 체제는 창조경제를 지원하기에 역부족이다. 현 금융 체제는 건전성 관리에는 장점이 있지만 잠재력 있는 기업을 발굴 육성하는 체제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한동안 관심권 밖에 있던 정책금융이 부쩍 거론되고 있는 것도 현 금융 체제에 대한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과거 개발 시대에 활용되던 정책금융을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정책금융도 시장 안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창조경제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금융 구조가 '시장 중심의 관계형' 구조로 진화해 나가야 한다. 시장이 금융 중개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되 금융과 기업 간에 장기적 안목의 긴밀한 관계 복원이 필요하다.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잠재력 있는 신생 기업이나 중소·중견기업들이 금융시장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이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융과 기업 간에 위험을 공유하는 제도가 치밀하게 확립되어야 한다. 금융과 기업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허무는 창의적이고 혁신적 제도와 도구가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한다.

창조경제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금융이 먼저 창조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