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에서 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어수웅 기자입니다.

어수웅 문화부 기자

요즘은 통섭이 유행이라죠. 문학을 담당하기 전에 저는 영화도 담당했었답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문학도 했고, 영화도 하는 김대우(51) 영화감독. 영화 ‘음란서생’과 ‘방자전’의 감독이죠. 꽤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매혹적인 텍스트입니다. 테스토스테론 넘쳐나는 외로운 영혼들의 밤을 지켜주는 심야 케이블 영화 채널의 단골작품이기도 하고요.

저는 문화부 기자를 15년 정도 하면서, ‘예술가들의 삶을 바꿔 놓은 단 한 권의 책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뷰 할 때도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는 편이죠.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는 없겠지만, 예술가라면 그런 결정적 텍스트가 꼭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김대우 감독에게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그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방자전'의 김대우 감독.

김 감독 이야기를 오늘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숫자에 압도당했기 때문인데요, 그는 이 소설을 500번 읽었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았죠. 어떻게 5번도 아니고, 한 작품을 500번이나 읽어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설득력이 있더라고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답니다. 소년 김대우는 ‘권장 도서’라고 써 있는 책 한 권을 누나 방에서 발견했다죠. 바로 이 작품 ‘로빈슨 크루소’. 고등학생이던 누나의 독후감 숙제 목록 중 하나였답니다. 그 전까지 소년 김대우가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태평양 전쟁’류의 잔인하고 처절한 전쟁 서적뿐. 요즘 젊은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김대우는 활자중독증에 걸려 있던 소년이었던 겁니다. 신문이나 잡지 책을 깜빡 잊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치약 뒷면에 적힌 성분표라도 읽어야 하는 그 무서운 병(病) 말이지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행여 예술가 계통이셨느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네요. 군인이셨다는겁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집에는 ‘태평양 전쟁’ 이런 류의 책 밖에 없었다는거예요. 당연히 ‘로빈슨 크루소’같은 고전이 반가웠을 수 밖에요.

김 감독은 ‘로빈슨 크루소’를 “모공이 열릴 만큼 음험한 쾌락과 욕망을 만족시킨 책”이라고 제게 소개하더군요. 모공이 열릴 만큼 음험한 쾌락과 욕망이라. 마치 자기 영화 ‘음란서생’ ‘방자전’ 같지 않습니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살게 된다면 당신은?

사실 이 작품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어떻게 음험한 쾌락과 욕망으로 읽습니까. 차라리 기독교적인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기억되는 책이죠. 배가 난파한 뒤 유일한 생존자가 된 로빈슨 크루소의 악전고투(惡戰苦鬪) 생존기. 그런데 정상적인 소년이라면 권선징악으로 읽었을 이 동화 요약본을 소년 김대우는 다르게 읽습니다.

난파된 배에 남은 주인없는 물건들은 크루소의 차지가 되죠. 그 크루소에 자신을 포개버린 겁니다. 현실에서야 절도는 꿈도 안꾸는 바른생활 소년이었지만, 소설 속에서야 상상 속에서야 누가 뭐라겠어요. 남의 물건을 탐닉하는 즐거움.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ty pleasure)’라 할까요. 이 범죄적 쾌감이 소년을 전율케 했다는군요. 그 정도 농담이야 서로 이해하는 사이라고 믿고 말하자면, 김 감독은 문화적 변태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음험한 쾌락을 느끼고 500번을 반복 독서하는, 활자중독 변태감독^^.

소주 한 잔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김 감독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작가 다니엘 디포는 1600년대 인물. 우리에게는 지구 반대편의, 인종도 피부색도 완전 다른 작가죠. 그 책을 500년 뒤 후손이, 그것도 영화를 만드는 한국인 감독이 집에 돌아와 500번을 읽었다고 하면, 디포는 저세상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말이죠. 반대로 자기는 또 이렇게도 생각해 본답니다.

전기(電氣)도 스탠드도 노트북도 없던 시절, 자신의 작은 책상에서 호롱불 하나 켜 놓고 날카로운 펜촉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 줄 한 줄 종이 위에 써내려가는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긴 작품을 쓴 것일까. 김 감독도 범죄적 쾌감을 느꼈지만, 다니엘 디포도 자신만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을까. 기독교적 권선징악은 명분일 뿐이고, 크루소가 획득한 노획물의 쾌감을 작가인 자신도 함께 느끼면서, 아무하고도 나누지 않을 그 노획물을 혼자 누리면서. 한 줄씩 사각사각 말이죠.

신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정동 골목길에는 매화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보무도 당당하게’가 아니고, 담벼락 한 편에 수줍게 서 있는 매화죠. 어제만 해도 앙상하더니, 오늘은 팝콘처럼 활짝 망울이 터졌더군요. 이 글을 읽는 당신. 당신에게는 그런 ‘음험한 쾌락’을 주는, 당신만의 ‘길티 플레저’가 있습니까?

PS.

아까 앞에서 김 감독을 ‘문학도 했고 영화도 하는’이라고 소개했었죠?

그는 고등학생 시절 시를 썼답니다. 문학소년 김대우가 시를 포기한 눈물겨운(?) 사연 하나를 추신으로 첨부하죠.

청년 김대우는 대학 신입생이 된 후 한 공모전에 응모했다는군요. 부모와 학교의 뜻에 따라 첫 입학은 한 대학의 기계과였는데, 마음은 여전히 문학에 가 있는 시절이었답니다. 그 공모전에서 자랑스럽게도 시 부문 3등에 뽑혔다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문학 등단의 관행은 추천제. 권위있는 심사위원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하면, 문인이 되는 겁니다.

그 심사위원은 대학교수였다는데, 문학 동아리를 함께 하던 선배들이 그랬다는군요. 그 교수님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고요. 그런데 찾아갔더니 정작 그 심사위원은 ‘김대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분위기는 싸늘해졌겠죠. 침묵이 계속되다가 그 교수님의 한마디. ‘아! 그 공대생!’

기억해준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쁨에 들떴던 신입생에게 심사위원은 반전의 비수를 꽂습니다. “응모자 중에서 공대생은 자네 혼자였는데, 장려 차원에서 뽑았어. 공대생도 시를 써야지, 그럼!”

이제 쉰을 넘긴 나이가 됐는데도, ‘장려 차원’이라는 그 표현을 잊을 수가 없다는군요. ‘장려 차원’. 그리고 ‘교수님’은 이런저런 설교와 훈계를 시작했답니다. 물리적 시간은 기껏 10~20분 정도였겠지만, 상처 받은 대학생이 느낀 체감 시간은 3일 이상. 심사위원이 설교하던 그 ‘3일’ 동안, 대학생 김대우는 머리를 숙이고 결정했습니다.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 이제부터는 일기도 안쓴다? 운(韻)이 있는 건 뭐든지 쓰지 않을거야. 노래 작사도 안해!”

김 감독의 문학적 재능이 어느 정도 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덕분에 우리는 재능 충만한 영화 감독 한 명을 얻게 됐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