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포드·부시, 세 미국 대통령은 모두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다. 1913년생 동갑인 닉슨과 포드는 제대 후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열여덟 살에 전쟁터에 뛰어든 아버지 부시는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석유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정치인이 됐다. 세 사람은 '지 아이 빌(G.I. Bill)'이라는 제대군인원호법의 본보기 성공 사례로 꼽힌다.

▶제대군인원호법은 2차대전 종전(終戰)을 앞둔 1944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만들었다. 1600만 전역 군인에게 교육·주택·보험·의료·직업훈련에 파격적 혜택을 주는 법이다. 덕분에 수많은 군인이 직장을 얻어 실업난을 피했다. 젊은이 780만명도 대학 학비를 지원받아 전후(戰後) 미국 경제를 일으키는 주축이 됐다. 오바마 대통령의 외할아버지도 퇴역 후 이 법의 도움을 받아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퇴역 군인을 영어로 베터런(Veteran)이라고 한다. 우리는 복무를 마치고 고향과 사회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재향(在鄕)이라는 표현을 쓴다. 재향군인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품격이 갈린다. 캐나다는 '특별한 시민'으로 규정해 그들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지켜주는 '재향군인 권리장전'을 두고 있다. 프랑스는 재향군인과 레지스탕스 출신을 위해 해마다 60조원을 쓴다. 영국은 재향군인 통합 서비스망을 만들고 사회복지기관과 함께 일대일 상담을 하며 어려움을 살핀다.

▶우리 재향군인회는 1952년 전상(戰傷) 장병과 제대 장병의 생활을 돕는 단체로 설립됐다. 연륜이 환갑을 넘겼어도 활동은 썩 활발하지 못하다. 회원이 850만명이라지만 해마다 나오는 제대 장병 25만명 중에 회비를 내고 가입하는 정회원은 1000명이 안 된다. 사병 출신의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선진국 재향군인회가 회비와 기부금, 기념품 판매로 살림을 꾸리는 데 비해 우리는 예산의 70%를 정부 보조로 메운다.

▶예비역 장병의 복지에 신경 써야 할 재향군인회가 영리사업에 한눈을 판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급기야 부실 건설사들에 돈을 마구 빌려주다 4000억원을 떼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뒷돈을 받거나 부실 대출을 지시한 간부 13명이 기소됐다. 몇몇 집행부가 수백만 재향군인 명예에 먹칠을 하는 꼴이다. 미국에선 11월 11일 재향군인의 날이면 퇴역 장병들이 특별 번호판을 단 차를 타고 거리로 나선다. 시민들은 차에 감사 카드와 꽃을 얹는다. 재향군인에 대한 사회의 눈길과 대접이 나아져서 우리도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