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도리 없이 전인권의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최성원이란 이름의 폴 매카트니와 전인권이라고 불리는 존 레넌의 밴드'라고들 하지만, 전인권의 절창(絶唱)을 라이브로 다시 확인하니 소름에 한기(寒氣)마저 들었다. 1987년 해체 후 26년간 책갈피에 납작 말라있던 들국화가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5일 서울 서교동 인터파크 아트홀에서 열린 들국화 콘서트 '다시, 행진'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420석을 가득 메웠다. 정확히 오후 8시, '그것만이 내 세상'의 후주(後奏)가 퍼지면서 59세 동갑인 전인권과 최성원, 그리고 한 살 적은 주찬권이 무대에 등장했다. 이윽고 익숙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행진'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음반과는 달리 최성원이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하고 노래를 시작했고, 전인권이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하고 이어받았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노래하는 것도, 객석이 기대와 흥분으로 초조해지는 것도 1985년 여름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과 똑같았다. 다만 들국화와 관객 모두 서른 살쯤 나이를 더 먹었고, 그때 작은 지하 소극장을 범벅으로 메웠던 화장품과 땀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작곡가 겸 베이시스트 최성원(왼쪽에서 둘째)이 사실상 들국화의 프로듀서이지만, 들국화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전인권(오른쪽)이었다. 짧게 끊어치는 주찬권의 드럼이 들국화 음악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진 곡은 영국 록밴드 'Wishbone Ash'의 명곡 'Everybody Needs A Friend'였다. 기대했던 'The Hollies'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는 아니었으나, 전인권이 고르는 외국곡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노래였다. 고음 부분에서 원곡의 느낌이 돌연 초라해져버리는 것이다.

재결합 후 첫 공연이었던 작년 여름 지산 록페스티벌에서 20대 관객들에게 "야, 반갑다" 하고 인사했던 전인권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최성원이 리드하는 '매일 그대와'에 이어 '사랑일 뿐이야'를 연주할 때, 사람들은 그간 전인권을 안쓰럽고 미심쩍게 보던 눈초리를 거둬들였다. 배전반의 모든 스위치를 한꺼번에 올린 것처럼 수직 상승하는 전인권의 보컬은, 2000년대 중반 윤도현 공연 게스트로 나와 '돌고, 돌고, 돌고'를 부르며 숨 헐떡이던 그와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이어 멤버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잠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 거나 물어보라"는 말에 누군가 "꿈이 뭐예요?" 하고 묻자, 전인권이 "들국화의 꿈은 이 가요계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거예요"라고 답해 환호성이 터졌다. 젊은 여성 관객이 "20대 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요" 하고 물었을 때는 "고생"이라고 답했다.

신곡 '노래여 잠에서 깨라'와 '걷고, 걷고'는 최성원과 전인권의 포크록 정신이 여전함을 보여줬다. '걷고, 걷고'에는 들국화 특유의 '아침이 다시 밝아오겠지'라는 가사가 들어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라는 노래 제목을 '행진' 가사에도 썼던 이들의 음악은 항상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는 사실을 반복해 노래했다. "들국화 시절 'PD 선생님'이란 말을 하기 싫어서 방송 출연을 안했"던 이들은 순전히 공연과 음반만으로 1980년대 무력하고 암담했던 청춘들의 피를 데웠었다. 들국화 1집이 '한국 대중음악 명반 1위'에 꼽힌 데는 이런 정서도 한몫 했을 것이다.

전인권 독집에 실렸던 '사랑한 후에'에 이어 '그것만이 내 세상'이 연주됐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하이C(High C·가온 도보다 두 옥타브 높은 도)보다 반음 낮은 하이B까지 올라가는데, 전인권은 이 엄청난 고음의 연속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물론 '하이C의 제왕' 루치아노 파바로티처럼 아름답게 들리지는 않았다. 인상 한번 안 쓰고 올리는 그의 초고음은 멸종된 고대 동물의 울부짖음 또는 알 수 없는 기계장치에서 나는 굉음처럼 들렸다. '행진'이 다시 연주되면서 관객 모두 일어나 노래를 합창했다. 그러나 400여명이 기 쓰고 부르는 노래를 전인권의 보컬이 고압전류처럼 꿰뚫어버렸다. 사람들은 전인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즐겁게 좌절했다.

2시간여 공연이 끝나자 "어째서, 왜 이제야 재결합했을까?"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앙코르곡 '제발'의 가사가 떠올랐다.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지 못해/ 한낱 외로운/ 사람일 뿐야." 공연은 14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02)334-7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