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93-1번지 '백인제(白麟濟) 가옥'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친일파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이 1913년 건축한 대지 면적 2459㎡(743평) 연면적 499㎡(150평) 규모의 이 한옥은 백병원 원장을 지낸 백인제 선생이 소유하다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22호로 등록됐다. 꼭 100년이 된 문화재급 한옥이지만 일반 관광객은 수년째 구경은커녕 내부에 들어갈 수도 없다. 대신 한옥 앞에는 거대한 크레인과 굴착기가 옆집 공사를 하느라 먼지를 흩날렸다.'옆집'은 재작년 12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45억원에 매입한 482㎡(145평)짜리 한옥으로,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 회장과 이웃사촌이 될 사람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박 시장은 작년 11월 "혜화동에 있는 시장 공관을 2013년 3월까지 '백인제 가옥'으로 옮기겠다"고 밝혔었다. 박 시장이 공관을 옮기려고 한 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울성곽 복원사업'에 혜화동 공관이 지장을 준다는 문화재청과 시민단체의 오래된 반발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100년 된 문화재급 한옥 건물을 공관으로 과도하게 리모델링하며 지하주차장과 연못·정자 건설 등을 추진해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달 내 마치려던 공관 이전 계획은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받지 못해 무기한 연기됐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등에 따르면, 박 시장 측은 한옥 마당에 연못과 정자는 물론 '선큰(sunken·지하에 자연광을 유도하기 위해 대지를 파내고 조성한 공간) 가든'까지 만들려 했다. 문화재위원들은 작년 12월 심의에서 "선큰으로 인해 마당이 함몰되어 꺼져 있는 것처럼 보여 선큰의 크기를 조절하는 게 좋다. 정자와 연못은 어울리지 않으므로 원래 마당을 그대로 두는 게 좋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올 1월 열린 2차 심의에서도 위원들은 "작업 공간 확보를 위해 안채의 방을 해체하면 안 된다. 사랑채의 안방을 접견실로 사용하더라도 방의 형태는 유지해야 한다"며 서울시의 변경 요청을 거부했다. 한 문화재 위원은 통화에서 "거기에 살 사람(박 시장과 가족)들이 한옥 지하를 파서 주차장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새 공관이 될 서울 종로구 가회동‘백인제 가옥’문이 굳게 닫혀 있다. 서울시가 이 한옥에 지하주차장과 연못₩정자 등을 만들려다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받지 못해 공사가 무기한 연기됐기 때문이다. 앞마당에 있는 건설 장비와 자재들은 이웃 한옥 리모델링 공사를 위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당초 시민들을 위해 '북촌 문화센터' 용도로 서울시가 구입한 한옥을 시장 공관으로 쓰려는 발상부터 무리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2009년 12월 '백인제 가옥'을 141억원에 사들이면서 "북촌 문화센터로 사용 중인 '민형기 가옥(연면적 237㎡·71평)'이 너무 좁아 '백인제 가옥'을 '북촌 문화센터'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실제 2011년 6월부터 예산 22억원을 들여 '백인제 가옥'의 리모델링을 시작했으나, 박 시장이 공관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서울시 측은 "성북동·삼청동 등의 여러 한옥을 새 시장 공관으로 물색했지만 40억~50억원씩의 예산이 필요해 예산 절감을 위해 시 소유인 백인제 가옥을 공관으로 삼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관 개조 비용만도 북촌 문화센터 리모델링 비용인 '22억+α'가 될 것으로 보여 실제 예산 절감 효과는 거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당대 최고 권력가가 만든 백인제 가옥은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모든 건축 기법이 녹아 있는 유산"이라며 "시민의 세금으로 샀으면 시민을 위한 역사 교육 현장이나 당초 목적인 북촌 문화센터로 시민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시장 공관으로 쓰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