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지난 21일 퇴임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퇴임 직후 곧바로 출국금지 조치를 한 사실이 확인돼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은 원 전 원장이 지난 2011년 8월 국회 정보위원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이정회)는 '국정원 여직원 댓글 의혹' 사건 등과 관련해 야권(野圈)으로부터 국정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출국금지시켰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퇴임식을 가진 지난 21일 출국금지 조치를 취했으며, 조만간 그를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원 전 원장은 24일 해외로 출국하려다 포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본지 취재 결과, 원 전 원장은 24일 오전 11시 5분 서울 출발 일본 도쿄 나리타행 델타항공 578편 항공권을 예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야권에서는 원 전 원장이 퇴임 직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학교에 객원 연구원 신분으로 나가 장기간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일부 언론은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은 닷새 뒤인 29일 저녁 7시 35분 도쿄를 출발해 서울로 돌아오는 델타항공 579편도 함께 예약했다.

원 전 원장은 몇몇 국정원 간부에게 "일본에 가서 며칠 쉬다가 오겠다"면서 "다녀와서 4월 8일 저녁을 함께 하자"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실제 미국에 가서 오래 머물려던 계획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누리당 등 여권(與圈)은 물론 국정원 내부에서도 고소·고발 사건이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퇴임 직후 출국을 시도한 원 전 원장의 처신에 대해 "부적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민주통합당 등 야당은 이날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하려는 원 전 원장을 막아야 한다"며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온종일 '대기'했다.

검찰이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린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는 분석이다. 검찰 관계자는 "모든 피고소·고발인에게 출국 금지를 하지는 않는다"면서 "사건의 경중, 출국 및 도피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는데 이번 경우는 정무적 판단도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국정원 여직원 사건'에 쏠린 여야 정치권의 관심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원 전 원장은 실국장·부서장 회의에서 정치 공작을 직접 지시했고 지난 대선 때는 대북심리단을 운영해 인터넷 여론 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 과정에서 검찰 수사가 완료되는 즉시 이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키로 합의한 상태다.

검찰은 이런 상황에서 원 전 원장의 출국을 방치했다가 귀국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인사 청탁 로비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2009년 퇴임 직후 미국으로 떠난 뒤 1년 3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자 '출국 방조 의혹'에 시달렸다.

검찰로서는 원 전 원장 소환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한 공소시효는 선거 이후 6개월에 불과해 수사의 신속성이 요구된다는 점도 감안됐다.

검찰 주변에서는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퇴임하자마자 해외로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대선을 치른 국정원장들은 줄줄이 사법처리를 받았다. 1997년 대선을 치른 권영해 전 원장은 퇴임 1개월여 만인 1998년 4월 이른바 '북풍(北風)사건' 등으로 구속됐고 2002년 대선 당시 신건 전 원장은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구속됐다. 2007년 대선을 치른 김만복 전 원장은 2011년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에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비밀 내용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친정인 국정원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앞으로 원 전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 9조를 위반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공개한 25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원 전 원장이 이명박 정부의 역점 사업인 4대강 사업이나 자유무역협정(FTA), 원자력발전소 등의 성과를 국민이 명확히 알도록 홍보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출국 금지를 했다고 해서 원 전 원장에 대한 기소 여부를 결론 낸 것은 아니다"면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지지하라고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어서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법리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