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전 9시 13분. 인천공항 입국심사대 앞에서 한 인도네시아 남성과 인천공항 출입국관리소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 합법적으로 한국에 일하러 온 거라고요. 왜 이래요?"

"잠시 저희 재심(再審)실로 같이 가시죠.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래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재심사대에 앉은 L(33)씨에게 직원이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오른쪽 사진은 L씨의 여권 사진, 왼쪽은 지난 1998년 입국했다 2005년 불법 체류로 강제 추방당한 인도네시아인 R(40)씨의 사진이었다. 두 사진의 얼굴 생김새는 똑같았다.

(오른쪽 사진) 21일 조선족 전모(71)씨 이름의 위명 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인천공항에서 적발된 조선족 이모(63·사진 왼쪽)씨. 이씨는 중국에서 5만위안(약 800만원)을 주고 위명 여권을 구입했다고 진술했다.

사진을 본 L씨는 깜짝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직원이 "오른쪽은 본인 여권 사진이니까 잘 아실 테고요. 왼쪽 사진도 L씨 본인 맞죠?"라고 묻자 L씨는 대답을 못했다. 직원은 "우리 얼굴 인식 시스템에서 두 사진 일치율이 75%가 나왔다. 70%가 넘으면 같은 사람일 확률은 95%가 넘는다"고 설명했다. L씨는 결국 10분도 안 돼 왼쪽의 R씨 사진도 본인이 맞는다고 털어놨다. L씨의 본명은 R씨. 불법 체류로 추방당한 R씨는 한국에 들어올 방법이 없자 L씨의 이름을 빌려 이른바 '위명(僞名) 여권'을 만들었던 것이다.

본지 기자가 이날 인천공항에 오전 9시부터 약 7시간 있는 동안 R씨 외에도 인도네시아인 1명, 중국인 3명, 베트남인 1명이 위명 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적발됐다. 하루 평균 인천공항에서 12명이 위명 여권 사용으로 입국 거부 조치된다. 2012년 위명 여권을 쓰다 적발된 사람은 인천공항 기준으로만 3735명에 달한다.

위명 여권 사용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지난해의 3735명은 2011년 1807명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인천공항 관계자는 "2012년부터 얼굴 인식 시스템이 새로 도입되면서 적발 건수가 크게 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입국한 위명 여권 사용자의 규모에 대해 인천공항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계속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중에 최근 국내 위명 여권 입국자 실태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지난 20일 위명 여권으로 10여년 전부터 순차적으로 입국한 조선족 일가족이 뒤늦게 적발된 것이다. 법무부 이민특수조사대가 검거한 박모(62)씨 가족은 2000년대 초부터 4명의 가족이 차례로 위명 여권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한국에 정착해 돈을 벌었고, 서울 광진구에 시가 약 2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해 함께 살았다. 가족 4명 중 3명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나머지 1명은 영주권을 받았다. 이들은 위명 여권을 사용했다는 여러 증거가 나오자 "우리가 걸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한국에서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시간만 주면 알아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민특수조사대는 이들의 한국 국적 취소를 신청한 상태다. 이민특수조사대에서 2010년 9월부터 현재까지 적발한 위명 여권 입국자는 500명이 넘는다.

위명 여권은 범죄자들에 의해 악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자기 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위장 신분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민특수조사대와 경찰이 지난해 살인·강도를 저지르고 우리나라로 도피했다 붙잡은 위명 여권 입국자만 50여명이다. 지난 2010년엔 탈레반 활동을 한 파키스탄인이 위명 여권으로 입국해 대구에서 이슬람 성직자 활동을 하다 검거돼 추방 당하기도 했다.

이민특수조사대 관계자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여권이지만 여권 자체는 해당 국가가 발행한 정품(正品)이어서 적발이 더욱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