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가, 명색이 동양화과 교수인데도 "60 평생 산수화를 그려보긴 처음"이라고 한다.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답한다. "전통적 산수화엔 관심이 없었어요. 산수화를 하게 된다면 새로운 방법으로 풀어내고 싶었죠. 그래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어요."

김병종(60) 서울대 미대 교수가 내달 1~24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 및 두가헌에서 신작 40여점을 걸고 '생명의 노래-산수간(間)'을 연다. 지난 20일 그의 과천 작업실을 찾았더니 과연 산수화처럼 보이는 그림들이 벽과 바닥에 널려 있었다. 웅장하고 고요한 전통 산수화와 달리 뭔가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그림. 전통 산수에서는 거대한 자연을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인물이나 동물, 사물은 점처럼 조그맣게 그리지만, 거꾸로 동물과 사물을 중앙에 커다랗게 그리고, 산수는 은은한 배경으로 깔아버렸다. "기존 산수화의 엄숙주의를 깨뜨리고 산수화의 부속물처럼 여겨져 왔던 생명체를 클로즈업했어요. 일종의 '패러디'인 셈이죠. 산수를 모태(母胎)로 인식하고, 생명체를 자궁처럼 포근하게 감싸도록 했죠. 전통 산수는 묵선(墨線) 중심으로 그려지지만, 저는 대신 색선(色線)을 썼습니다."

20일 김병종 교수의 과천 작업실엔 산수보다 개미, 나무, 복숭아 등 사물이 부각된 이색적인 산수화가 널려 있었다.

작명(作名)도 독특하다. 험준한 산맥 한가운데 커다랗게 알록달록한 개미 한 마리를 그려놓고 하단에 자그마한 복숭아와 닭을 그려넣은 그림은 ‘개미 산수’, 폭포 옆에 커다란 연밥을 그리고 우측 상단에 학을 그린 작품은 ‘연밥 산수’라 이름붙이는 식. 송이버섯 같은 게 오글오글 모여있는 그림을 가리켜 “이건 버섯이냐” 물었더니 웃으며 "소나무숲을 그린 '화려강산'"이라 말한다. '숲'을 보기보다는 ‘나무’를 살피는 미시(微視)적 산수인 셈이다. 산수 윤곽 표현에는 전통 동양화 준법(皴法)을 구사했지만, 전통 산수에서 안 쓰는 분홍, 노랑, 밤색 등 화사한 빛깔을 사용해 생명의 환희를 표현했다. "노자(老子)에 만물 생성의 근원을 '곡신(谷神·골짜기의 신)', 혹은 '현빈(玄牝·암컷)'이라 이르는 데서 동양의 산수화는 대자연의 생명 잉태와 관련된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죠."

'생명'은 그가 1989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다 소생한 후부터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주제. '꽃', '물고기' 등 화면 중앙에 생명의 상징으로 커다랗게 등장했던 동식물이 이번엔 산수라는 어머니를 만나 모자상(母子像)처럼 변형된 것이다.

회갑(回甲)이 올 5월이란 게 믿기지 않게 흑발동안(黑髮童顔)인 김병종은 "내 아호가 '단아(旦兒·아침의 아이)'라 그런지 나이가 들수록 더 왕성하게 작업한다. 요즘도 작업실에서 2~3일씩 밤을 새우고, 새벽 네 시에 허기져 라면을 끓여 먹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동양화가로는 드물게 80년대부터 독일, 파리, 미국 등 해외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활발히 활동해 온 그는, 올해와 내년에도 뉴욕, 베를린, 후쿠오카 등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199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화첩기행'도 북아프리카편까지 합쳐 6권짜리 전집으로 내고, 한옥 탐방 에세이집, 16년 기르던 애견 자스민 이야기를 담은 일러스트집도 출간한다.

예인(藝人) 기질 넘치는 이 남도(南道) 사내는, "놀라운 생산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무심한 듯 말했다. "아직 감(感)이 좋다." (02) 2287-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