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영화 '스토커'(Stoker)로 할리우드에 출사표를 던졌다. 해외의 자본, 외국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작품에서 과연 박찬욱의 색깔은 그대로 묻어날 수 있을까란 우려 반 기대 반 속에 출발한 이 여정은 이제 결과물로 관객들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18살 생일 아버지를 잃은 소녀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찾아오고, 소녀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박찬욱의 스릴러적 장기를 고스란히 담았고 밀도있는 심리드라마로 깊이를 더한다. 박찬욱은 이 작품은 간단히 '소녀의 성장기'라고 설명했다. 박찬욱이 그리는 소녀는 어떤 모습일까? 더욱이 남자 감독이 여자,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주인공으로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와 동갑내기(한국나이 20살) 딸이 있다. 그래서 좀 안다. 딸이 아빠 영화 중 최고라고 하더라"는 말로 자신감을 보였다. 박찬욱은 이 작품이 그의 전작들 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말했다. 그의 첫 할리우드 도전기는 개봉을 앞두고 국내와 현지에서 시사를 통해 영화가 공개된 현재, 영화에 대한 평들과 반응을 보면 일단 절반의 성공은 거둔 듯 하다.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려있는 지금, 22일 오후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 다음은 박찬욱 감독과의 일문일답.

- '스토커'는 무엇에 대한 영화인가?
▲ 한 소녀의 성장기다.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느끼는 혼란을 보여준다. (남자로서 소녀 얘기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인디아와 동갑내기 딸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좀 안다. 옆에서 본 감상으로도,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관계는 만국 공통이니까(웃음).

- 노출이 전혀 없는데 굉장히 에로틱한 피아노 신이 인상적이다.
▲원래 웬트워스 밀러가 쓴 각본에 있던 건데, 작곡가를 만났을 때 이 곡에서 표현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사랑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남자가 몰래 다가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뭔가를 기대한다. 멋있는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가 여자에게 직접대는데 여자는 이 남자를 아예 무시한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아우' 좀 이러면서 치고 들어간다. 하지만 여자가 자리를 내주지 않자 엉거주춤 서서 눌러보며 엉덩이 한 쪽을 걸친다. 영화 속에서 보면 매튜 구드(찰리 역)는 의자에 엉덩이를 반 밖에 안 걸치고 있다. '흥' 하던 여자가 역습을 한다. 그것은 공격 같지만 반응하는 거다. 둘이 이제 신나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 섹스와 같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제는 도리어 여자가 더 흥분하고 희열을 느낀다싶을 때 남자는 스르륵 없어진다. 제 욕심만 채우고 사라진 것이다. 여자는 '내가 꿈을 꾼 건가?'란 생각에 멍하다. 찰리가 인디아의 몸에 팔을 두르는 것은 작곡가의 아이디어였다. 작곡가가 '내가 네 개의 손으로 치는 연주곡을 만들었는데 어떤 부부 연주자가 '이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라며 거의 안으면서 연주하더라고. 야, 그거 참 에로틱하다란 생각이 들었어'라고 하더라. 그 일화를 듣고 시나리오를 바로 고쳐썼다. 이렇게 그 신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노력이 들어갔다.



- 인디아 역의 미아 바시코브스카도 그렇지만 매튜 구드의 캐스팅도 인상적인데?
▲겉으로는 부드러운 사람, 여성적이란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신사 같은 이미지 안에 악마와 어린 아이가 있는 배우였음 좋겠다고 캐스팅 디렉터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한 동안 못 찾았다. 그런데 촬영 감독이 영화 '매치 포인트'에서 조연으로 나온 그를 보고 '저 사람 어떠냐'고 하더라. 영상을 통해 런던에 있는 그와 통화를 했는데 너무 좋았다.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닌데, 그가 충분히 악마스러움을 표현할 수 있겠더라. 실제로는 굉장히 개구쟁이다. 나 뿐 아니라 스태프들 다들 반했고 캐스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굉장히 빡빡한 일정으로 촬영했다고 들었다. 촬영 횟수가 좀 더 주어진다면 뭘 다시 찍고 싶나?
▲시나리오 상에서 못 찍은 건 없고, 대신 한 신 한 신 더 공들여 찍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 테이크를 찍으면 다시 현장에서 재생해서 보고 현장 편집이 되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개념이 없더라. 그걸 못하니까 불안하더라. 재생을 왜 해야하는지 이 사람들은 필요를 못 느끼고, '마음에 안 들면 한 번 더 찍자' 이런 식이다. 현장 편집은 꿈도 못 꾸니 불안한 상태에서 찍었다. 자연스럽게 데뷔할 때가 생각나더라. 그 때는 현장 편집은 물론이요 모니터도 없었다. 신인감독은 뷰파인더도 못 보게 했다. 배우가 어떤 사이즈로 찍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신인의 마음으로 찍었다.

-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은?
▲피아노신이다. 3달 연습하고 하루를 온통 그거 찍는 데 썼다. 오히려 민감할 수 있는 미아의 샤워 장면은 시간에 쫓겨서 나중에 정신없이 후다닥 찍었다. 얼떨결에 끝나 버려서 배우에게도 그게 나았을 수 있다.

- 할리우드 데뷔 소감은?
▲다시 데뷔하는 기분이 들긴 했다. 첫 영어 영화라는 것도 있고, 사실 영화 '박쥐'를 끝냈을 때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굉장히 오래 준비한 영화였기 때문에. 10년 구상한 영화가 끝나서 내 영화 경력의 챕터 하나가 정리된 기분이더라. 그 만큼 텅빈 것 같은 기분도 들었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았다. 새 출발하는 기분이 여러모로 들었다.

- 각본을 쓴 웬트워스 밀러(우리에겐 '석호필'로 유명)는 재능있는 작가인가?
▲물론이다. 첫 작품이고 남자이고 배우고 젊은데, 이 네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볼 때 시나리오가 놀라운 것 같다. 어떻게 그런 글을 썼는지.



- 전작들과 연관돼 생각해볼 때 에너지 넘치고 강한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또 만약 미아가 아닌 한국배우가 그 역을 한다면 누가 잘 맞을 것 같나?
▲(끄덕끄덕) 맞다(그런 여성 캐릭터를 선호한다). 미아의 실제 성격도 그렇고 인디아의 캐릭터도 그렇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이 많이 생각난 게 있었다.

- 한국 배우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할 역할이 없다. 배경이 고립된 지역이고, 해 봤자 건달 중 한 명인데 그렇게 억지로 넣는 것도 웃기지 않나(시크한 말투에 웃음).

- 본인의 영화 중 '공동경비구역 JSA'를 최고로 생각하는 팬들도 있다. 박찬욱의 '착한 영화'를 또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스토커'는 내 마음 속으로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연장선상이다. 성장하는 소녀의 얘기니까.

- 영화를 본 딸의 반응이 궁금하다.
▲아빠 영화 중 제일 낫다고 하더라. 뿌듯했다.

- 바로 다음 작품은 직접 제작한 '설국열차'(감독 봉준호)다. 올해 기대작 중 한 편이다.
▲ 돈이 많이 들었는제 당연히 재미있어야지(웃음). 틸다 스윈튼의 놀라운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올댓시네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