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에 몸을 담가 때를 불려 미는 우리의 목욕문화는 사실 그리 오랜 전통이 아니다. 전통시대 우리 조상들은 강과 내를 찾아 흐르는 물에 미역(멱)을 감았다. 욕탕은 없었다.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모시거나 신(神)에게 복을 비는 고사(告祀)를 드리기 전에 하던 목욕재계(沐浴齋戒)도 못 볼 것을 보거나 들으면 하던 귀 씻기[洗耳]와 눈 씻기[洗眼]와 같이 마음의 정화(淨化) 의식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렇기에 소 여물통인 구유에 부은 물을 바가지로 퍼 한번 둘러쓰거나 제장(祭場)에 놓인 세숫대야에 손을 씻는 상징적 의례였다.

1950년대 목욕탕 모습 - 목욕탕이 아직 우리나라에 드물었던 1953년 부산 동래 봉래탕의 모습. 지금은 낯선“목욕 있습니다”라는 입간판은 요즘 어법으로는“목욕합니다”에 해당한다.

몸의 청결을 위한 목욕의 필요성은 근대로 향한 문이 열린 갑오경장 이후에 위생관념의 보급과 함께 계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인이 앉아 목욕료를 받는 매표소에서 남탕과 여탕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갈리고 터진 천장 너머로 남녀 욕객(浴客)이 서로 소통하던 일본식 대중목욕탕이 서울·부산·평양 등에 들어서기 시작한 1920년대에도 목욕은 만인의 상식이 되지 못했다. 1925년 8월 2일자 '조선일보'에 "우리 조선 여자들은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는 의례히 머리를 더 감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개탄하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1954년 인구가 140만명이던 서울의 목욕탕은 겨우 47개였다. 욕탕이 콩나물시루 같았던 1960년대까지 "목욕은 추석과 설날에 두 번 한다"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목욕은 연중행사였다. 1960년대 초 세상에 나온 이태리타월은 켜켜이 쌓인 때를 국숫발처럼 밀어내는 우리 특유의 목욕문화를 연 총아(寵兒)였다. 지금도 목욕탕의 필수품인 이태리타월은 이태리에서 들여온 기계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 아파트 시대의 개막과 함께 매일 몸을 씻을 수 있는 생활혁명이 우리를 찾아오자 목욕은 때밀이를 넘어서 즐기고 쉬는 여가문화로 진화하였다. 1971년 2000여 곳이던 목욕탕은 십 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났고, 사우나로 간판을 바꿔 단 고급 목욕탕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가족과 친지·연인들이 함께 목욕하고 찜질하며 음식도 먹는 복합문화 공간인 찜질방이 등장해 성업 중이다. 하지만 목욕탕에 들어설 때는 몸의 때를 벗기는 세신(洗身)뿐 아니라 마음의 때를 없애는 선인(先人)들의 세심(洗心) 정신도 한 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