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결혼을 앞둔 가구 디자이너 A씨는 최근 혼수로 마련할 가전제품을 알아보다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던 순백(純白)의 가전제품들이 눈에 띄게 확 늘었기 때문. 화려한 문양과 튀는 색상의 디자인은 대부분 사라지고, 아무 무늬 없는 깔끔하고 모던한 백색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몇년 전 결혼한 친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와인색 꽃무늬 냉장고를 사갔다는데 이제는 트렌드가 확 달라졌더라고요. 우리나라 가전제품도 서구처럼 깔끔한 기본 스타일로 회귀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민무늬 흰색 냉장고, 흰색 김치냉장고, 흰색 에어컨, 흰색 세탁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꽃무늬 일색이던 국내 가전제품이 바뀌고 있다. 단순하고 하얀, 모서리를 둥글게 한 디자인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1970년대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흰색 민무늬 기본형 냉장고도 등장하고 있다.

한 국내 대기업이 최근 내놓은 냉장고 모델만 봐도 이런 트렌드가 확연하다. 최근 이 회사가 출시한 냉장고 모델 96개 중 흰색 제품이 절반 가까운 42개나 되고, 이 중 30여개는 아예 무늬가 하나도 없다. 반면 수년 전 인기 모델이었던 와인색·빨간색 등 유채색 모델은 3개뿐이다. 김치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등도 절반 이상이 흰색이다. 다른 가전회사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과시용' '튀는 것'만 중시하던 국내 소비자들이 오래 두고 쓰는 가전제품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수년 전 가전회사들이 세계적 그래픽·패션 디자이너들을 섭외해 제품에 꽃·별 등을 수놓은 '아트가전'을 내놓았을 때는 소비자들도 집의 전체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홀로 튀는 오브제' 같은 제품을 선호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가전회사 디자인실 관계자는 "사실 아트 가전은 구매 고객으로부터 '가구와 안 어울린다' '보다 보니 질린다'는 불만도 적잖게 들었다"며 "한번 구입하면 10년 이상 써야 하는 데다 주변 가구와 조화롭게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흰색 민무늬만큼 가전제품에 적합한 선택이 없다"고 했다.

이순인 국제산업디자인협회 회장은 "서구에서 백색 가전은 그야말로 집 전체와 어우러지는 시스템과 같은 것"이라며 "실용성과 조화를 중시하는 디자인 트렌드에 맞춰 앞으로도 담백한 백색 가전 인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