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채널 19)에서 매주 월요일 밤 12시 10분 방송되는 '북잇(it)수다'는 작가와 기자, 평론가가 만나 작품과 사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유쾌한 자리. 손미나, 표정훈과 공동 진행을 맡고 있는 어수웅 조선일보 문학 담당 기자가 방송과는 또 다른 인터뷰를 싣는다.
오랫동안 궁금했다. 작가 이인화(47)가 8년 전 문학을 버리고 게임의 별로 떠난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가 아니었을까. 이화여대 교수 신분으로 PC방에서 '리니지2'에 몰입하는 열정 혹은 중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흥미롭게도 두 달 전 장편소설 '지옥설계도'(해냄)를 들고 나타났다. 8년 만의 소설 복귀다. 그의 본명은 류철균. 필명 이인화는 횡보 염상섭(1897~1963)의 '만세전'의 주인공 이름이지만 소설가와 개인 류철균 두 인격을 구분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예명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소설가'와 '게이머', 두 인격을 지닌 이인화를 만났다.
◇게임으로 인대 끊어지다
―우선 단도직입. 게임 중독을 인정하나.
"맞는다. 꽤 오래 약도 먹었다. 성인 환자 기준으로 치료를 마쳤다는 판단을 받았는데, 자녀를 둔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아직 치료를 요하는 환자로 보일 거다. 요즘은 하루 3시간 넘게는 하지 않으려 한다."
―42시간 연속 게임을 하다가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는 이야기의 진실은.
"사실은 두 가지 이야기가 합쳐진 거다. 집에는 학교 일이라고 거짓말하고 PC방에서 42시간 연속 '리니지2'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또 하나는 '길드워'라는 게임을 할 때였다. 1초에 16번 클릭이 가능한 로지텍 마우스를 쓰는데, 미친 듯이 클릭하다가 '악' 하고 쓰러졌다. 그때 역시 PC방이었고 새벽 3시쯤이었다. 너무 아파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에 집 앞 정형외과가 문 열자마자 들어갔다. 인대가 찢어졌다더라."
―부인이 정신과 전문의이자 게임 중독 클리닉 원장으로 알고 있는데.
"이 이야기 알려지면 안 되는데(웃음). 남편이 게임 중독 환자인 병원을 누가 찾겠나. 우리 집 서가에는 책이 둘로 나뉜다. 한쪽에는 '게임,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고, 반대쪽에는 '우리 아이가 인터넷 중독에 빠졌어요'가 있다."
―2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첫 장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의 표절 논란 이후 당신은 본격 문학이 아니라 역사소설 '영원한 제국'을 썼다. 100만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였지만 결국 도피 아니었나.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맞는다. 나는 현실도피주의자다. 하지만 현실도피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삶의 기제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인생도 있고, 베짱이처럼 여름에 노래 부르다 겨울에 굶어 죽는 인생도 있는 거다. 어쩌면 베짱이처럼 여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겨울에도 굶어 죽지 않는 삶, 그게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굶어죽지 않는 베짱이를 꿈꾼다
―궤변이다.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꿈이어서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래도 그런 꿈을 꿔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나는 베짱이처럼 살고 있고, 지금 내 주변의 게이머들이 베짱이다. 게임 세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나도 이 친구들이 정말 짜증 났다. 책도 안 읽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놈들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다르더라. 이 아이들은 현실이 불합리하게 디자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좋은 대학을 못 나왔기 때문에, 혹은 대학을 아예 못 갔기 때문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은 자기가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합리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렇게 유토피아인데 왜 문학의 별로 귀환했나. 왜 베짱이의 세계에서 투항한 건가.
"물론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의 변화다. 베짱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결국 피와 살로 된 육체를 가지고 있는 현실의 사람들이니까. 좀 더 좋은 세상으로의 진보를 바라고, 게이머들의 힘으로 그게 조금씩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그 희망을 전달하고 싶어서 돌아온 거다. 그게 이번 장편소설 '지옥설계도'이다. 물론 완전히 귀환한 것도 아니고 이제 두 별을 왕복할 것이다."
―표절 논란뿐만 아니라 당신은 문학평론가 류철균의 이름으로 소설가 이인화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웃음). 젊은 날의 치기였다고 봐 달라. 20년 전에는 모두가 '이인화=류철균'이라 알고 있을 때였다. 책 도매상들이 보는 관계자용 매체 '책마을'이었다. 정통 문예지였다면 절대 안 썼을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욕이든 비난이든, 완전한 매도든 나는 '책에 대해 말이 많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논란을 더 원한다는 뜻이다."
◇좋은 소설은 오래 팔린다
―다시 한 번 궤변이라고 비판한다면.
"장편소설은 세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장편소설을 쓴 작가에게 최고의 비극은 반응이 없는 것이다. 20년 전 내 세계관은 지극히 보수적이었다. 정치관도 마찬가지였고. 그때는 그게 논란이 됐다. 작가는 다른 비전을 가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나는 원래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35만명의 게이머가 참전한 '바츠해방전쟁'을 함께 하면서 나는 성선설을 믿게 됐다. 소위 집단지성의 힘 말이다."
―'영원한 제국'은 100만부 넘게 팔렸다. '지옥설계도'는 아직 두 달밖에 안 됐지만 1만부 정도라고 들었다.
"소설이 100만부씩 팔리던 시절은 많지 않았다. 문학의 위기라고들 하는데, 원래 이 정도 팔리던 시절이 대부분이었다.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이 100만부 팔렸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래오래 널리 읽혔다. 정말 좋은 작품은 100년간 100만부 팔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제국'처럼 1년에 100만부 팔리는 건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위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설사 종이책이 잘 안 팔리더라도, 탭으로 읽고 모바일 폰으로도 읽는 세상이다."
창작의 근원은 결국 결핍이다. 소년 이인화부터 문청 이인화의 숱한 결핍과 상처들이,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숱한 마음들이 지금의 이인화를 만들었다. 자녀의 게임 중독으로 고통받는 학부모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게임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아이들이 사회와 가족에게 상처주지 않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상처를 끌어안고, 결핍을 극복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게임과 문학 사이에 놓인 다리가 보였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결핍을 치유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둘은 매한가지다. 중요한 것은 도피 여부가 아니라 치유와 극복 여부에 달려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