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신부는 남편과 아내로서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잠깐!"

양승태 대법원장이 차분하게 성혼선언문을 읽다가 말을 멈췄다. 일순 긴장한 하객들 앞에서, 양 대법원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양 영화에 보면, 이럴 때 꼭 '이제 신부에게 키스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중요한 순간을 밋밋하게 넘어갈 수 없으니, 두 분도 만장하신 하객들 앞에서 입맞춤하시되, 너무 깊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29일 서울 서초동 법원 예식장에서 작은 결혼식이 열렸다. 주례인 양 대법원장의 유머에 200여명이 환호했다. 신랑 허창희(30)씨와 신부 양연정(30)씨가 부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현직 대법원장은 주례를 서지 않는다. 양 대법원장은 이런 관례를 깨고 이날 주례석에 섰다. '결혼은 작게 시작해 자기 힘으로 하나하나 키워나가는 것'이라는 가치관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자신도 두 딸을 간소하게 결혼시켰다. 양 대법원장은 주례사를 통해 "모든 결혼식은 경사지만 오늘은 신랑·신부의 가치관에서 은은한 향기를 느끼기 때문에 특별히 더 큰 축복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법원 예식장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주례로 작은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신부가 나란히 입장하고, 한복 대신 정장을 입은 양가 어머니와 양가 아버지, 양가 남동생이 차례로 입장했다. 틀에 박힌 예식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문화예술단체 ‘나눔과기쁨’ 관계자들이 축가 등 결혼식 진행을 공연처럼 꾸며주는 재능기부를 했다.

두 사람은 국내외 명문대를 졸업한 전문직이지만, 화려한 결혼식보다 작은 결혼식이 아름답다고 양가 부모를 설득했다. 결국 온 가족이 조선일보가 펼치는 '1000명의 작은 결혼식 릴레이 약속' 캠페인에 공감해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됐다.

축의금도 사양했다.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했기 때문에 신랑·신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화환 보내고 명함 교환하는 풍경이 벌어지지 않았다. 양 대법원장은 "내면의 가치를 충실하게 갈고닦은 이는 (부와 위세가 아니라) 미덕으로 남을 감복시킨다"면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예식으로 자기 결혼을 자축할 여건이 되는데도 그런 것을 택하지 않고 평범한 예식을 택하기로 한 분별력과 절제에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양 대법원장은 오는 9월 한 번 더 작은 결혼식 주례를 서기로 했다. 이번에는 고학력 전문직 젊은이들이 아니라, 트럭을 모는 남편과 갓 돌 지난 어린애를 키우는 이연주(가명·23)씨가 주인공이다. 이씨는 알코올중독 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자라다가 남편과 만났고, 시아버지(관광버스 운전기사)를 모시면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작은 결혼식을 돕겠다는 사람은 양 대법원장뿐 아니다. 문화예술단체 '나눔과기쁨'의 허순길 고문도 "작은 결혼식 확산 운동은 한 해 반짝하고 그쳐선 안 된다"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나눔과기쁨은 '1000명…' 캠페인에 참여한 젊은이 가운데 올해 결혼하는 7쌍을 뽑아 누구보다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한국뮤지컬협회 이종열 사무처장은 "작은 결혼식을 하려면 판에 박힌 식순(式順)을 버리고, 한편의 공연처럼 자기 나름대로 의미와 재미를 담아야 한다"면서 직접 7쌍의 사회를 봐주기로 했다. 그는 창작극 '레미제라블'을 2011~2012년 연거푸 대학로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은 중견 배우 겸 제작자다. 소프라노 강민성씨는 "작은 결혼식 올리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꺼이 축가를 불러주겠다"고 나섰다.

이날 법원 예식장에서 진행된 허씨 부부의 결혼식이 나눔과기쁨 팀의 첫 '작품'이었다. 허 고문은 "남은 6쌍도 각자 자기들의 사연과 개성에 맞게 식순을 짜도록 도와주고, 축가를 불러주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은 드레스·메이크업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