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의 한 해는 '얼굴 없는 천사'가 다녀가야 저문다. 천사는 기부 13년째인 올해 세모에도 이 '천사 마을' 기념비 아래에 5000여만원을 내려놓고 떠났다.

천사는 작년보다 1주일 늦은 27일 오후 1시 53분쯤 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왔다. 강재원(49) 행정민원 담당이 수화기를 들었다.

"(주민센터 뒤) 얼굴 없는 천사의 비 옆을 봐주세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주세요." 통화는 이 말과 함께 끊겼다. 강씨는 "가늘고 떨리는 듯한 남자 목소리에 60대로 느꼈다"고 말했다.

강씨가 "드디어 천사가 왔네요" 하며 직원들과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직원들은 크리스마스 전부터 천사를 기다리다가 혹시 올해는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천사비 아래에는 A4 용지를 담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5만원짜리 지폐 다발과 황금색 돼지저금통으로 채워져 있었다. 세어 보니 5만원권 1000장에 동전까지 합쳐 5030만4600원이었다.

상자 안에 두기도 했던 쪽지가 올해는 없었다. 2009년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 (추신)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전하고 싶습니다"는 메모를 남겼다.

얼굴 없는 천사가 이날까지 14차례 노송동에 보내온 돈은 모두 2억9775만720원. 2000년 4월 3일 초등 남학생이 '어른 심부름'이라며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민원 창구에 놓고 간 뒤 이듬해부터 세밑 기부가 이어졌다.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전북 전주를 찾았다. 27일 오후 완산구 노송주민센터 직원이 ‘얼굴 없는 천사의 비’ 옆에 누군가가 놓고 간 현금상자를 옮기고 있다. 상자 안에는 5030만4600원이 들어 있었다(왼쪽 작은 사진).

중장년 남자가 전화로 성금 위치를 알려온 것은 어린이날 전날을 포함해 두 차례 기부했던 2002년부터다. 그때마다 주민센터 옆 공중전화 부스, 화단 등에 현금이 든 쇼핑백이나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작년엔 5024만여원을 주차된 승용차 밑에 두고 갔다.

노송동은 이 돈으로 명절 때 동네 저소득 가구들에 10만원씩 보냈다. 송하진 전주 시장은 "세모만 되면 당신을 기다리면서도 지난 선행만으로도 시민 가슴을 울렸기에 이제 짐을 내려놓으셔도 감사하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한때 지역 기자들은 현금 다발 띠지의 출처로 천사를 찾아나서기도 했다. 이남기 노송동장은 "이제 주민센터 주변 CCTV로 천사를 찾을 수도 있으나 깊은 뜻을 헤아려 시도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천사의 실체를 밝혀 특종을 하겠다는 기자를 주민들이 거짓 제보로 허탕치게 하는 스토리의 연극 '노송동 엔젤'이 작년 11월 전주의 소극장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전주시는 2009년 12월 노송동 주민센터 화단에 '얼굴 없는 천사' 기념비를 세우며 그 옆길을 '얼굴 없는 천사의 거리'로 이름 지었다. 올해엔 마을을 가로지르는 2㎞ 거리를 '천사의 산책길'로 단장했다. 가게 간판을 정비하고 담장과 벽체 70여 곳에 어린이·사슴·꽃·피아노 등을 산뜻하게 그려 넣었다.

노송동 주민들은 10월 4일(1004)을 '천사의 날'로 정해 작년부터 불우이웃을 돕는 나눔과 봉사의 축제를 열어왔다.

지난 26일 전주에선 70대 후반 노인이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세 번째 찾아 수표 2000만원이 든 봉투를 남기고 서둘러 떠난 일도 있었다. 이 노인이 2009년 이후 세모에 공동모금회에 전한 돈은 7000만원에 이른다.